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카이퍼의 일반 은총론과의 대화(3): 카이퍼의 노아 언약 이해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 2024. 2. 1. 19:44

    <월드뷰>  283 (2024년 1월호):125-28에 실린 글을 여기도 실어서 더 많은 분들이 읽도록 합니다.

    -------------------------------------------------------------------------------------------------

     

                노아 언약에 대한 두 가지 견해들

     

    카이퍼는 16~17세기 신학자들 중 은혜 언약을 오직 신자들과만 맺어진 언약이라고 보는 견해를 두고,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노아 언약과 부합하지 않는다며 논의를 시작한다. 이때 카이퍼가 생각하던 신학자들은 하이델베르크에서 가르쳤던 데이비드 파레우스(David Pareus, 1548-1622)와 케임브리지 출신 신학자로 청교도 운동을 주도했고 화란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프랑크푸르트와 위트레흐트에서 가르쳤던 <이론적이며 실천적 신학>(Theologia Theoretico-Practica, 1682-1687)의 저자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흐트(Petrus van Mastricht, 1630~1706), 그리고 위그노 신학자 앙드레 리베(Andre Rivet, 1572-1651)였다(1:21). 물론 이 일련의 신학자들이 노아 언약을 오직 신자들과 맺은 언약이라면서 은혜 언약으로만 여긴 것은 카이퍼 자신이 논의하는 것과 같이 성경의 명백한 진술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카이퍼가 우려하는 것은 홍수 후 이 언약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오직 노아에게 말했다고 하는 견해다(1:22). 카이퍼는 주일학교와 교회에서 이런 견해가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것을 우려했다. 이것은 카이퍼가 지적하듯이 성경의 진술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 극단으로 나아가, 이 노아 언약은 모든 인류 그 자손들(9:9; 12)과 다른 피조물과도(9:10; 15; 16; 17) 맺은 것이니, 홍수 후의 노아 언약은 오직 일반은총의 언약이기만 하다고 보는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는 카이퍼가 시사하였고, 오늘날 데이비드 반드루넨이 대변하는 견해이다.

     

              노아 언약에 대한 바른 이해

     

    보다 더 정확한 견해는 노아 언약이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하면서 주셨던 은혜 언약의 한 국면이면서(이것을 데이비드 반드루넨이 무시하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라고 여겨진다), 동시에 일반 은총적 언약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반 은총적 측면이 토대가 되고, 그 토대 위에서 은혜 언약이 이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노아 홍수 후의 모든 여건이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는 카이퍼의 성경적 관찰을 토대로 볼 때도 이런 입장이 정확하다. 일반 은총에 의해 이 세상이 지속되어야 그 안에서 구속사가 진행. 그런 의미에서 일반 은총은 이 세상 역사가 계속되도록 하는 일종의 무대를 마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은총은 그 자체로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할 수 없다. 일반 은총의 작용으로 역사가 진행되어야 그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전개되는데 그 구원 역사 안에서만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사는 결국 언약의 진전을 따라 이루어지니 언약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노아 언약에 구속사적 의미가 전혀 없고, 이는 오직 세상을 유지시키기만 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지나친 것이다. 노아 언약은 일반은총적 의미도 가지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참 신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은혜 언약으로 먼저 기능한다는 점을 무시하면 안 된다. 실질적으로 성경 역사를 주의해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원()-복음에서 아브라함 언약으로 가기 전에 노아와 맺은 언약이 중요한 은혜 언약의 진전의 한 국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카이퍼의 잘못된 표현과 숨은 견해

     

    카이퍼가 때때로 마치 노아 언약이 특별은총의 언약이 아닌 것과 같이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아 언약이 근본적으로는 은혜 언약인데 그것에 일반은총적 함의가 상당히 있는 언약이라는 점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카이퍼가 표현하는 방식과 그의 의도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그의 표현 방식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카이퍼가 세 번째 글의 제목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노아 언약은 특정적이지 않았다”(1:19-27)고 하고 있고, 그 장의 중심부에서 이 언약이 특정적 은총의 언약(a covenant of particular grace)이 아니라 일반은총의 언약(a covenant of common grace)”이라고 말한다(1:23). 이는 마치 카이퍼가 노아 언약은 전혀 은혜 언약이 아니고 오직 일반 은총의 언약이라고 말하는 인상을 준다. 또한 칼뱅이 노아 언약의 대상을 전 포괄적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은혜 언약”(foedus ... omninus populis commune)이라고 말하는 바를 인용해서 마치 칼빈도 그런 의도만을 가진 것으로 오도한다. 그래서 칼빈-카이퍼 대() 파레우스, 펄킨스-반 마스트리흐트의 대립 구도가 있는 듯이 제시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기에 이 점이 상당히 아쉽다.

     

    노아 언약에 일반은총적 성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이것이 없는 듯이 말하는 신학자들에 대해서 카이퍼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1:23). 그러나 역으로 노아 언약에 오직 일반적 성격이 있고, 특정한 성격이 없는 듯이 말하는 카이퍼의 표현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원 약속이 있는 창세기 3, 그리고 9장에도 특정한 은혜의 구속적 언약이 언급될 때 여호와(the Lord)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음을 잘 관찰하고 말한다. 특히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9:26)”를 생각한다. 그러나 야벳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9:27)”라며, 그저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노아 언약에서는 여호와라는 언약적 이름이 생략되고 그 대신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타남을 본다고 강하게 말한다(1:23-24). 노아 언약은 여호와와 맺은 것으로 보기보다는 모든 육체의 하나님과 맺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24).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렇게 대조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는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바로 앞 8장에서 홍수 후에 노아가 제사할 때 카이퍼 자신이 언급하듯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때는 노아의 제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노아에게가 아니라 스스로(8:21: “그 중심에 이르시되”) 말하시는 것이고, “여기서는 새 언약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카이퍼의 논의(1:25)는 좀 지나친 것이다. 오늘날 노아 언약을 논의할 때는 홍수 후의 상황과 언약 전체를 염두에 두고 논의한다. 또한 8장 마지막 부분이 바로 이후로는 이 세상의 질서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여(8:21-22) 9장이 말하는 바를 다 미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홍수 이후에는 일반 은총의 죄를 억제하는 힘이 더 증가되었다(1:26)는 카이퍼의 주장은 확증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 앞에서 말하는 홍수 전이나 후나 죄인은 그 존재의 중심에서 죄악된 것이다”(1:26)는 말은 매우 정확한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이 일반 은총의 언약인 노아 언약으로 죄악에 대한 억제력이 더 커져서 더 이상 홍수로 표상하는 파멸이 없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드러내기도 어렵고 우리의 경험과도 거리가 있다.

     

    오히려 홍수 전이나 후나 인간 존재 전체가 죄로 물들어 있기에 홍수 전과 같이 하면 계속해서 홍수로 멸해져야 하기에 다시는 그와 같이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창세기 기사의 의도이고, 카이퍼가 인용하고 있는 칼빈이 말하는 바이다. 그래서 세상 끝 날까지는 이 세상의 질서가 계속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카이퍼가 상정한 바와 같이 홍수 후에 이 세상이 덜 악해졌다고 할 만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역사가 인간의 사악함을 더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뛰어난 카이퍼가 왜 이렇게 무리한 주장을 하는가? 그것은 일반 은총의 역사적 출발점이 노아 홍수 후의 언약에 있다고 보고, 그 언약은 기본적으로 일반 은총의 언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니 그런 생각에서 다음과 같은 무리한 주장도 하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야수성은 이전과 같이 악하고 사납지만, 가두고 있는 우리 사방의 철이 훨씬 강화되어서, 이전과 같이 다시는 도망하지 못하게 되었다”(1:26).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카이퍼에게 과연 그러한가 하는 강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노아 언약을 말하면서 카이퍼는 구속적 언약의 의미를 잘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물론 그 자신은 노아 언약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륜으로 그가 기뻐하시는 아드님을 지향하고, 일단의 택자들(the body of the elect)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의 영예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1:27). 그리고 이것이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흐트(Petrus van Mastricht)의 논의가 정확히 본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스트리흐트의 논의가 혼동된 진술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 것과 비슷하게 카이퍼가 혼동되지 않게 노아 언약의 구속적 언약 측면을 좀 더 드러내면서 노아 언약에 대한 논의를 했어야 했다고 판단된다. 현재 그가 하는 진술로는 카이퍼는 노아 언약이 일반은총의 출발점이라는 전제에 너무 충실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많은 문제들이 도출된다. 그 자신이 홍수 이전부터 일반은총이 이미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 점을 좀 더 주목하면서 논의했으면 일반 은총에 대한 더 온전한 논의가 되었을 것이다.

     

    카이퍼는 지금도 불법의 비밀이 작용하고 있으나 나중에 궁극적 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때는 지금 작용하고 있는 막힘이 사라진다고 한다(살후 2:3-6). 그런데 그 막는 것”(2:6)이 일반 은총으로 사라지면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the burning of the elements) 종국적 과정이 있게 될 것이라는 카이퍼의 논의는(1:27) 막는 것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 상당히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막는 것의 작용이 과연 노아 언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카이퍼가 다른 곳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타락 직후에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에 이런 일반 은총적 보존이 이미 언급되고 있으며, 그것이 노아 언약의 일반은총적 측면에서 더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전체 정리

     

    노아 언약에 죄를 억제하는(the binding and restraining of sin) 기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도 은총이라는 것을 잘 드러낸 것(1:27)은 카이퍼의 논의의 큰 장점이다. 그래서 일반 은총적 언약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마치 노아 언약으로 시작된 것으로 말하고, 이를 말하다가 때때로 노아 언약의 특별은총적 성격을 다소 무시하는 듯한 진술한 것은 카이퍼의 큰 문제점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