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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이퍼의 일반은총론(1)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 2023. 11. 9. 20:37

     <월드뷰>  281 (2023년 11월호):102-106에 실린 글을 여기도 실어서 더 많은 분들이 읽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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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에 대해서는 그의 논적도 그가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지고작업하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잘 하는 사람(multi-tasker)이었다. 참으로 다양한 일을 하는 중에 개혁파적 입장에서 사회 정치적 모든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1877127일부터 시작된 일간 신문인 스탄다르트지에 기고한 글 가운데서 기독교적 정치원리를 잘 설명한 (1877년에서 1878년까지 쓴) 글들을 모아 출간한 우리의 계획(Ons Program, 1879)이 카이퍼의 정치적 생각을 잘 정리한 것이라면, 주간지인 드 헤르아우트”(De Heraut, the Herald) ()에 낸 여러 글들 가운데서 1879년부터 연재했던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를 3권으로 묶어 낸 일반은총에 대하여(De Gemmeene Garatie, 1903-1905)는 그의 주저(magnum opus)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책 일반은총을 통해서 우리들은 카이퍼의 여러 사회적 활동의 토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1권은 역사적 부분으로 이루어진 67개의 글이고, 2권은 교의적 부분으로 91편의 글이고, 3권은 실천적 부분으로 71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부터 1879년부터 카이퍼가 연재한 이 229편의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그의 일반 은총론과 대화하려고 한다.

     

              일반은총의 전제와 터로서의 특별은총

     

    카이퍼는 매번 성경 구절 하나를 제시하고 논의하는 방식으로 이 글들을 썼다. 11장은 서론이라고 하면서 베드로전서 3:20 앞부분의 전에 노아의 날에 ...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시작한다(I:1). 후에 논의될 바와 같이, 일반은총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는데서 나온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카이퍼는 1878년에 창간된 주간지인 드 헤르아우트”(De Heraut) ()가 처음에는 자신들의 조상들의 칼빈주의적 고백, 은혜는 특정적이라는 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증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개혁파 진리를 회복하려는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1:1). 이 때 카이퍼는 한 편으로는 자신이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던 자유주자였다가 개혁파적 진리에로 회복된 것도 생각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화란 개혁파 교회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가 개혁파적 진리에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듯하다. 개혁파적 진리는 모든 것을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선언하려는 것이니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지 회복되어야 할 진리다. 우리들의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도 먼저 개혁파적 진리의 회복, 즉 우리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함으로 얻는다는 특정주의적 진리, 그 배타적 진리를 분명히 한 터에서만 논의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반은총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카이퍼는 그에 의해 우리가 구원받는 특별은혜라는 토대를 먼저 간단히 정리하여,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특별은총에 근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개개인을 구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별은혜, 특정한 은혜(particular grace)는 개인, 구원 받는 그 사람, 영광에 들어가는 그 개인을 다룬다”(1:2).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개인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금 사슬에 싸여 있는 사람이다(1:2). “개인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권적 은혜의 열매다.”(1:5) 카이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의 심장(the cor ecclesiae)으로, 그것은 개혁파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확고히 붙잡아야 하는것이라고 한다(1:2). 이 진리를 버리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기 전에라도 교회는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다(1:2).

     

    그런데 구원 받는 그 개인은 항상 교회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일 뿐이다. “개인, 즉 이 단독자는 성도들의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1:2). “개인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도들의 공동체에 속한다”(1:3). “선택은 개별적으로 되었으나 우리는 다 함께 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고, 같은 몸의 지체들이다”(1:2-3). 이렇게 다른 가지들과 함께 자라나고 꽃 피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권적 은혜로만 가능하다”(1:5). 언약교리는 이 진리를 강조하고, 이 진리에 공정한 것이다(1:2). 그러므로 언약의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특정한 개인적 은혜에 대한 고백은 비진리이고 비성경적이다”(1:3,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성령님과 관련해 이루어지는 성화에서 개인의 선택은 처음으로 확실한 것(a certainty)이 된다”(1:3). , 성화에서 우리는 선택을 확신하게 된다. “신자로 하여금 개인적 선택을 확신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인정하므로 은혜가 특정적임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즉 성도들의 공동체의 지체임을 인식하여 신앙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언약의 영광이 그 앞에서 일어나게 된다”(1:4). 그러므로 언약 교리가 없으면 선택 교리가 손상되고, 선택 교리를 손상시키면 우리가 확신할 수 없게 된다”(1:2).

     

                                 인류 전체에 미치는 일반 은총

     

    그런데 언약의 속한 사람들도 인류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도 가정과 나라와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원이 에덴동산에서부터이며, 그로부터 기원한 인류의 삶에 참여하는 인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창조의 영광과 개인의 출생 사이에 타락이 있다”(1:4). “그리하여 죽음의 그림자가 세상과 세상의 인류,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세상과의 관계에 드리워 있다”(1:4). 그런데 그렇게 깨어지고 손상된 피조계도 은혜와 접촉한다”(1:4). 그것이 일반은총, 모든 [타락한] 사람들과 함께 인간으로서 받는 하나님의 은혜(1:4).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하지 않기 위해 카이퍼는 자신이 일반 은총(gratia communis, common grace, gemmeene grati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보편적 은총(general grace, algemeene genade)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보편적 은총라는 말은 그 말이 구원하는 은혜라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오해하여, 특정적 은혜의 이미 잘 수립된 토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낼까를 염려하는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1:6). 그러므로 일반은총은 구원하는 은총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해야 한다.

     

    과거의 신학에서는 이 주제를 이교도들의 덕”, “시민적 의”,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등을 다루는 데서 다루었다(1:7). 그런데 한 곳에서 일관성 있게 다룬 일은 거의 없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이 주제를 한 곳에서 다루지 않았기에 이를 강해할 때에도 역시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자신이 때때로 이 개념을 사용하여 왔지만, 1894126에 있었던 깜픈 신학교 총장 취임 연설에서 헤르만 바빙크가 일관성 있고 온전하게 이 주제를 다루었다고 하면서, 카이퍼는 이제 이 주제가 우리의 삶에 이르렀고 현재의 투쟁에로 들어와서본격적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이 논의를 시작해 보자고 한다(1:7).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 말하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련하여 이 주제를 생각할 수 있고,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의 반응과도 연관된다고 한다. 기본적 요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성의 작용이 전혀 방해받지 않고 그 무서움 그대로 시행되면 일반은총은 없다는 것이다(1:7).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오래 참으시니, “엄위하신 분께서 잠시 죄에 대해서 참으시는 신적인 인내 때문에 일반은총이 있게 된다”(1:7).

     

    카이퍼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교도들과 불신자들 가운데서 옳음과 고귀함이 자주 그렇게 수준 높게 나타났는지에 대해 대답하면서 이런 일반은총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표명했다고 말한다(1:7).본성의 부패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의 여지가 있으니, 본성의 부패를 깨끗이 하는 것은 아니고, 내면적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방식으로 은혜가 작용할 여지가 있다는 칼빈의 말을 카이퍼는 매우 중요시한다(1:8). 이 말의 라틴어는 이 은혜가 우리의 죄를 제거하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 있다”(Gratia non quae illam purget, sed intus cohibeat)는 말이라고 하면서, 그 의미는 그 문단 끝에서 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본성의 부패성에 재갈을 물리셔서 그 극에 이르지는 못하게 하시나, 그것을 정결케 하시는 것은 아니다”(1:8). 카이퍼는 여기에 일반은총 교리의 뿌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반은총이란 철학적 창안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죄의 아주 심각한 성격에 대한 고백에서 나온 것이다(1:8). 개혁파 선조들은 성경을 따라서 죄와 허물로 죽었었다”(2:1)는 것을 아주 심각하게 고백했었다. 그런데 죄된 세상 안에 교회 밖에도 우리가 시기할 정도로 아름답고 존중한 말한 것이 나타나는 현실(1:9) 우리 선배들은 잘 관찰했다. 그 앞에서 개혁파 사람들은 재세례파 사람들처럼 그 모든 선을 부인하든지, 아니면 타락한 인류가 결국 그렇게 심하게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알미니우스주의적 이단(the Arminian heresy)으로 가지 아니했다(1:9). 개혁파 사람들은 이 세상의 교회 밖의 불신자의 선과 아름다움에 대해 눈감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타락 이후 죄된 본성의 전반적인 부패성을 최소화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이 세상의 이교도들 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데, 이 은혜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구원하는 것도 아니며, “죄 안에 잠복해 있는 잔해를 억제하기 위한 현세적 은혜인데(1:9), 이를 일반은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은총은 (1) 죄로부터 구하는 은총은 아니고, 죄를 억제하는 은총(restraining grace)이며, (2) 오직 현세에만 작용하는 은총(a temporal grace)이며, (3)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shared in common among a particular group) 은총이다.

    이런 일반은총은 (카이퍼가 노아 언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를 있을 수 있게 하며(교회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며), 교회의 쉴 곳(a place of rest)을 마련해 주시만, 교회 자체에 관련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교회에 유익을 주며 교회가 미래에 융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도 표현 할 수 있지만구원하여 교회를 세우는 은혜는 아니다(1:13).

     

              카이퍼의 논의 방식의 문제점

     

    다른 데서도 그런데 일반은총 논의를 시작하는 논의에서도 카이퍼는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또는 유기적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그래서 성화를 성령님과만 연관시켜 말하고, 구속을 성자와만 관련시켜 말하고, 특히 창조를 성부와만 관련시켜 말하는 경향이 있다(1:4-5에서 이것이 특히 나타난다). 물론 그가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으나 그런 인상을 주면서 논의한다. 그래서 신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논의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런 인상을 주지 않도록 논의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밖을 향한 사역은 그 어떤 것이나 나누어지지 않음이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논의했더라면 오해를 방지 할 수 있고 더 좋았을 것이다.

     

    기계적이고 도식적으로 표현하다보니 카이퍼는 은혜의 세 가지 시금석”(three touchstones of grace)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1:5). (1) 전적으로 개인적인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이름이 새겨진 흰 돌(전적으로 특정적인 은혜) - 선택된 각 개인에게 주어진 은혜를 카이퍼는 항상 특정적 은혜(particular grace)라고 한다(1:5, 6) (2)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누리는 복된 은사인 언약 은혜(covenant grace)라는 시금석 교회에 주어진 은혜를 카이퍼는 항상 언약 은혜라고 한다(1:5, 6) 그리고 (3) 인류의 자녀에 속하고 모든 인류의 자녀들과 함께 누리도록 주어진 일반적 인간적 은혜(a general human grace)라는 시금석이다. 이것에 대해서 때로는 일반적 은혜(general grace, algemeene genade)라고도 한다(1:6).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카이퍼가 제시하는 방식이 도식적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 결과로, 카이퍼의 의도를 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 있게 한다. 이 모두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로 언급되었으니 사실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오해 방지를 위해서 특별 은총과 일반은총에 대한 구별이 더 분명히 제시될 수 있게 제시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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