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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들의 관계:개교회주의와 교권주의를 극복한 ‘교회들의 관계’를 지향하면서
    신학이야기 2022. 10. 31. 20:46

    <월간 고신 생명나무> 2022년 11월호: 33-37에 실린 글을 여기에도 게재하여 더 많은 분들이 일고 생각하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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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가 이 땅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할 수 있는 대로 세세하게 규정한 <도르트 교회 질서>에서는 마지막에 교회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두 가지 조항을 말한다. 기본적인 교회들의 관계를 말하고(84), 특별히 해외 교회들과의 관계도 말한다(85). 이미 이런 규정을 하는 것 속에 포함되어 있고 도르트 회의의 국제적 성격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만 특별히 이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이번에는 주로 교회들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84조의 의미를 생각하고자 한다.

     

             교회들의 관계에 대한 큰 원칙

     

    여러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있는데(교회의 다양성) 그 교회들이 다 하나의 교회라는 인식이 있어서 이렇게 성경의 원칙을 반영하여 교회 질서를 같이 제정하여 선언하고 우리는 이렇게 함께 하는 하나의 교회라는 것(교회의 통일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개체성과 독립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 질서> 규정 전체와 이 조항은 다음 두 가지를 배제하려는 것이다.

     

    첫째는 개교회주의를 배제한다. 각각의 공동체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함께 <교회 질서>를 제정하여 선포하는 의미이다. 우리들은 같이 연결된 하나의 교회이지 그저 각기 떨어져 있는 교회들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함께 노회와 대회와 총회로 모여서 우리 교회들의 일을 같이 의논하며 교회의 머리이시고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나간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회와 총회 등에서 교회의 대표자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한 결정에 대해서(이 회의들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지를 잘 보여 준다!) 우리들은 (예를 들어서, 신사참배가 그저 국가적 행사이고 따라서 각 교회가 이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정한 총회의 결정과 같이) 명백히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 교회들이 받아서 같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지, 그저 참고만 하거나 때로는 무시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들의 관계는 그저 회중주의적(congregational) 입장이 아니다. 각 회중이 알아서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노회나 총회 등의 결정 사항은 각 회중이 판단해서 참고하거나 따르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오늘날 한국의 큰 교회들이 드러내고 있는 개교회주의적 태도와 큰 교회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들이 드러내는 입장에서 나타나는 개교회주의적 입장은 성경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만연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신앙의 입장은 얼마나 더 있을 수 없는 것인지를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우리들은 그저 개별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와 자매되어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하나의 교회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뜻을 명백히 하여 주시며 우리들의 구체적 상황에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같이 받아가야 한다. 17세기 초에 도르트에서 모여서 이런 교회질서를 마련하도록 하신 것과 우리들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둘째로, 우리들은 교권주의도 배제한다. 이것이 84조의 의미이다. 84조는 이렇게 진술한다. “그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그 어떤 방식으로도 좌지우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목사님도 다른 목사님들의 위에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장로님과 집사님도 그 어떤 방식으로도 다른 장로님들과 집사님들 위에 있으려 하면 안 된다.” 여기서 배제하려 한 것이 교권주의다. 후론할 교권주의가 배제된 동등한 교회들, ‘동등한 직분자들이 자유롭게 한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것84조가 규정하려하는 성경적 관계성이다.

     

             이런 규정을 한 역사적 배경

     

    이 규정 자체는 교권주의를 염두에 두면서 그것을 배제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이는 중세에 오랫동안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생각하면서 나온 매우 적극적 규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신약 교회는 사도들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와 그 나라가 극치에 이르기를 바라면서 교회를 형성하며 살았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그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사도적 가르침을 성령님에 의해 받아들인 교회는 정상적인 경우에는 구약과 사도들의 글로 이루어진 신약으로 이루어진 성경과 성령님을 따라 살아 나갔다.

     

    그러나 성경과 성령님에게 유의하지 않으면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곧바로 어떤 특정한 지역의 유력한 교회들의 지배에 종속해 갔고, 그리하여 처음에는 몇 개의 중심적 교회들이 나타나서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 로마 교회 등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다가 점차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서방에서는 로마 교회가 중심이 되어 강력한 주교좌들이 형성되어 다른 교회들은 다들 이들 교회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되었다. 점차 형성된 무시무시한 위계질서(hierarchy)가 교회에 들어 선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영향 하에 있게 되어 그가 그저 콘스탄티노플 주교 정도가 아니라 총대주교로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의 주교가 그저 로마 주교 정도가 아니라 교황(Pope)이라고 선언되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들을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립하고, 한 장로(presbyter)가 사제(priest)요 주교(bishop)요 또한 교황(Pope)으로 온 세계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감독”(episcopus)이라는 말을 성경적 의미에 충실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각 교회 공동체의 장로님들(, 오늘날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모두가 장로들이요 따라서 감독들로 언급되었다(20: 17, 28 비교; 1: 5, 7절 비교; 딤전 3:1-7; 딤전 5:17-19 참조). 따라서 교회는 각 교회의 목사님들(잘 다스리시면서 동시에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분들, teaching elders, 교훈 장로들)과 장로님들(잘 다스리는 장로들, ruling elders, 치리장로들)을 동시에 감독들이라고도 부르고 그들이 성령님 안에서 치리하고 목양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가야 했다. 주께서 이런 직분과 그런 명칭을 주신 줄 알고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 일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같은 이들 가운데 앞장 서는 분”(prius inter pares, first among equals)이라는 뜻으로 다들 인정하면서 존경 받는 의미로 사용하던 감독이라는 말이 점차 다른 직분자들과는 급이 다르면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성직자라는 뜻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모든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좋은 분들이 이런 위치에 있을 때는 문제를 의식하지 않고 있다가 점차 이런 위계질서가 더 분명해 지고(위계질서는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때때로 매우 악한 사람들이 이런 지위에 오르고 그런 분들의 세습이 이루어지고 하면서 문제는 가속화되었다. 사람들이 천년 이상 이 제도 이래 있으면서 자신들의 교회가 문제 속에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저 좋은 분들이 주교가 되고 좋은 분이 교황이 되기만을 바랄 정도였다. 성경과 성령님에게 민감하지 않으면 언제나 사람들은 이런 잠에 빠져 들어간다. 중세기 동안에 가장 경건한 분들도 이런 위계질서가 비성경적이며 우리 주님의 뜻에 위반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비참한 세대여! (우리들이 집단적으로 이런 영적인 잠에 빠져 들어가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이런 잘못된 교회를 위해 주께서 성경에 비추어 심지어 교회의 제도도 고치도록 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특히 칼빈을 따르는 분들은 이점까지를 아주 분명히 선언하여 각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분명히 회복시켰다. 그 뿐 아니라 주교좌에 있는 주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모든 장로님들(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우리들은 잘 치리하시는 감독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회복하였다. 따라서 진정으로 성경을 따른다면, 모든 주교들을 어거하며 교회를 통치하는 총대주교나 교황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였다. 그 정신을 따라서 도르트 교회질서 84조는 그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그 어떤 방식으로도 좌지우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목사님도 다른 목사님들의 위에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장로님과 집사님도 그 어떤 방식으로도 다른 장로님들과 집사님들 위에 있으려 하면 안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화란 교회, 즉 회란 개혁파 교회가 칼빈의 전통에 충실한 개혁 교회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이상의 함의를 지닌 규정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다른 교회 위에 있는 교회가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유력한 지위에 있는 교회가 다른 교회들을 지배하려 하거나 좌지우지하려는 것을 경험하고, 어떤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들 위에 있는 것을 경험하고, 어떤 장로님이 다른 장로님들 위에 있는 것을 경험한 당대의 교회의 규정이라는 것을 생각하야 한다. 대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교회가 그렇지 못한 교회를 좌지우지 하려는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것까지를 생각하면서 그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들 위에 있지 않으면 그 어떤 목사님도 다른 목사님들 위에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

     

    이런 규정 앞에서 우리들도 성경과 역사에 비추어서 우리들을 잘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천주교회 같은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은연중에 우리 안에 교회 안의 위계질서가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잘 돌아 보아야 한다. 또한 교회 안에서도 우리 안에 위계질서가 있지 않은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같이 한 보조로 나가면서도 각 교회의 독립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식으로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하고, 또 각 교회는 노회에 속한 다른 모든 교회들과의 유기적 관계 가운데서 우리 교회의 문제를 처리하려고 해야 한다. 유력한 입장에 있는 교회가 자신들이 이런 저런 도움을 주는 것 때문에 다른 교회에 대해서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런저런 복잡한 역사와 관계성이 작용해서 이기는 하지만 노회가 우리 교회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라지고, 함께 지도를 받아 나가는 위치에 서야 한다.

     

    참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지도를 받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부패한 인간성은 그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서로의 지도를 받아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나이 들어 갈수록, 우리 교회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제대로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겸손하게 다른 지체들의 지도를 받으려고 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성령님 안에 다른 지체들을 통해서 우리들을 통치해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들은 함께 주님의 뜻을 받들어 가려고 노력하게 되고,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다른 교회의 일에 무리하게 주입하여 반감을 일으키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다들 다른 분들 밑에 있어서 섬기며 함께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섬겨가야 할 것이다.

     

    조선 평양 장로회 신학교 전경

                                                      이런 바른 교회 관계를 잘 가르쳤던 그 신학교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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