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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보기도신학이야기 2022. 10. 5. 09:34
<월드 뷰> 268호 (2022년 10월호): 100-104에 실린 글을 여기도 실어서 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생각하도록 합니다. 같이 생각해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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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그의 온전한 삶과 가르치심과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구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때때로 나타나셔서 부활을 확증하시고, 구약 성경과 연관하여 자신의 사역의 의미를 잘 설명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도 그러하고, 이 땅에 다시 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계신다(행 3:21).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사역을 “그리스도의 천상 사역”(the heavenly works of Christ)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이 천상 사역의 결과로 이 땅의 교회가 존재하고 보존되어 진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적인 몸된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고 보존하시고 돌아보시고 통치하시며 인도해 가신다. 그와 함께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다(요 17:20-21). 이를 그리스도의 중보기도(the intercession of Christ)라고 한다. 이번에는 이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토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과 구속 사역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토대는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과 그가 이루신 구속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세우셨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연합하시어 성육신하실 때 그는 신성도 손상시키지 않으시고, 인성의 가장 온전한 모습을 잘 드러내셨다. 이는 우리네 인간들이 하나님의 엄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들은 감히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he was “in the form of God”)”(빌 2:6)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the form of a slave”)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taking “human form”)”(빌 2:7)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이렇게 참 하나님 되심(신성)과 참 인간됨(인성)이 한 위격 안에 있기에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는 그의 크심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여 다른 것을 추구하게 하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늘과 땅의 그 어떤 피조물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은 없다.”(벨직 신앙고백서 26항). 그는 인간성을 취하셔서 우리들 가운데로 들어와 인간성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셨다.
그러나 (순전히 가정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만 하시고 구속 사역을 이루지 않으셨으면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놀라운 구속을 이루어 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롬 5:10) 우리를 위해 그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누가 있는가? 그가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 이것이 그가 이루신 구속 사역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유일하신 중보자요 중보기도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요일 2:1)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과 그의 중보기도에 근거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의미
구속 사역을 마치신 그리스도는 그의 영원한 성자의 자격으로서는 물론이거니와 이제 인간성을 취하신 분으로서 또한 구속 사역을 마치신 그리스도(메시아)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셨다(마 28:18). 즉,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10:12), 그리하여 죄를 정결케 하는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다”(히 1:3; 10: 12).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롬 8:34)로 언급된다.
그 권능의 자리에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롬 8:34). 참으로 “그는 항상 살아 계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7). 이를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라고 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의 한 부분이 된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간구, 더구나 우리를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 주신 분의 간구보더 하나님께 더 잘 전달될 간구가 있는가? 따라서 그의 간구는 반드시 성취되는 간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를 그가 입을 열어 소리를 내어서 하는 기도로 해석하려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우리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기도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에 은혜로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든 점을 생각할 때 이는 구속에서 그가 성취하신 바가 그가 피 흘려 사신 지체들에게 온전히 적용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모든 것을 공적으로 청구하는 것이라는 개혁파의 이해가 더 사실과 부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다 같이 생각해도 좋은데 그 때 후자의 이해가 토대가 되어 전자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이미 그가 다 이루신 구속 사역의 결과를 청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힙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 그래서 그가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를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그것도 소심한 마음으로가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고 말이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섬김의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같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할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 갈 것이니라(히 4:14-15).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었나니...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 22)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중보 기도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도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로 담대하게 나가야 한다. 날마다 기도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벅찬 특권과 사명이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면 이것을 바르게 믿는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첫째로, 다른 중보자를 필요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래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으니,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유일하신 중보자 앞에서 다른 것을 중보자로 찾는 것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을 무시하는 무시무시한 죄악이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중보 기도자(another intercessor)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신데 무슨 다른 중보 기도자가 필요한가? 벨직신앙고백서 26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아드님을 우리의 중보기도자로 주셨으니, 그를 떠나 다른 중보 기도자에게로 가거나 찾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하지도 말자.” 종교 개혁기에 이런 말을 할 때 그 때 개혁자들은 천주교회에서 마리아나 성자들을(saints)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자들로 존숭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1) 온전하신 중보 기도자인 그리스도께서 계신데 다른 중보 기도자가 있을 필요가 없음을 가장 강조하고, (2) 천주교에서 소위 성자들이라고 하는 분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이 그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들 자신이 일관성 있게 이를 거부하였음을 언급한다. 소위 성자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 이런 다른 중보 기도자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들은 무가치하기에 우리보다 더 가치 있는 분들이 위해서 기도해 주면 효과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와 위엄에 근거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덕과 공로와 엄위에 근거해서 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의는 믿음으로 우리의 것임 된다는 것을 밝히 지적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는 기도의 성격상 그리스도 외의 다른 중보 기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한다. 마리아가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성자들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거나 그것이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우리들이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즉, 그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를 불러 아뢸 때, 우리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천부께 간구한 모든 것을 다 받을 줄을 확신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벨직신앙고백서 26항)
물론 성도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특히 딤전 2:1-2) 서로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사도들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였고(모든 서신의 문안 인사와 마지막 기도들 외에도 롬 9:1-3, 15:33, 16:20; 고후 13:9; 엡 1:15-19, 3:15-21; 빌 1:9-11; 골 1:9-12; 살전 3:11-13, 5:23; 살후 2:16-17, 3:3, 16; 히 13:18) 또 때로는 성도들의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롬 15:30-32; 엡 6:18-20; 골 4:2-3; 살전 5:25; 살후 3:1-2).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다(약 5:16). 심지어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복을 빌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롬 12:14). 그러나 그런다고 우리가 중보 기도자(intercessor)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형제, 자매를 위한 우리의 기도가 효과를 내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의 중보기도 덕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열심히 간구하지만 그것 자체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기도가 효과를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만이 우리의 유일한 중보 기도자(Intercessor)이시다. 우리는 다른 중보 기도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서로를 위해 열심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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