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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배에서의 찬송과 혼인식에 관하여
    신학이야기 2022. 6. 22. 22:11

    <월간 고신 생명나무> 2022년 7월호:15-19에 실린 글을 여기에 올려서 더 많은 독자들이 읽고 생각하도록 합니다. 읽고 깊이 생각해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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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서의 찬송과 혼인식에 관하여 (도르트 교회질서 69, 70)

     

    이번에는 아주 어렵고도 중요한 두 가지 별개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그 하나는 예배에서의 찬송에 대한 문제이고, 또 하나는 혼인식에 대한 규정이다. 이 문제들은 그 하나하나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편의상 여기서 같이 다루기로 한다. 이 두 문제 모두 당시 회란 개혁파 교회들의 다양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총회로 모여서 이 문제들에 대한 규정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전체적 이해를 위해서 각각의 문제에 대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는 어떻게 하였는지, 종교개혁 이후 당시 화란 교회들은 어떻게 하였는지, 그리고 도르트 교회질서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예배에서의 찬송 문제

     

    예전 유대인들의 회당예배에서 시편을 찬송하던 것을 채용해서 신약 교회는 예배에서 찬송을 해 왔으나 중세 시대에 성도들은 예배 중에 몇 가지 후렴구만 반복할 뿐이었고, 찬송은 특별히 준비된 소위 성가대가 독점하였었다. 그 때는 초대교회와는 달리 회중 찬송이 없었고 그들의 일상 언어로 하는 찬송은 없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예배를 개혁할 때 찬송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접근들이 있었다. 루터(14831546)는 예배 중에 회중 찬송을 도입하였다. 가장 유명한 것이 1529년 스파이어 제국 회의(the Diet of Spires, 1529)를 계기로 하여 나타난 내주는 강한 성이여같은 코랄(chorale)이다. 이런 회중 찬송은 칼빈(15091564)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욱 강조되었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 예배에서 회중 찬송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만들었다. 칼빈파의 교회는 노래하는 교회라고도 알려졌다. 이와 같이 개혁자들은 공예배 중에 회중찬송을 회복해 내었다. 이것은 음악을 높이 사던 가장 음악에 재능이 많았던 쯔빙글리와 그를 따른 사람들의 이해와는 좀 다른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음악은 너무 강력하고 감정적이어서 예배 중에는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다. 그래서 노래하는 대신에 회중이 성경구절들은 교독하도록 했다. 그러나 츄리히와 제네바가 잘 협의하면서 결국 스위스 개혁파 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칼빈적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입장을 높이 사던 화란 개혁파 교회도 역시 노래하는 교회였고, 예배 시간에 회중 찬송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17세기 화란 개혁파 교회에 제한 의미의 찬송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더 폭 넓게 생각하면서 다양한 찬송이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도르트 교회질서는 이런 의견의 대립이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더구나 1612년에 우트레흐트의 항론파 노회에서 48개의 찬송을 도입하는 결정을 하였기에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에 대해서 아주 강력한 규정을 만들어 제시하였다. 그것이 도르트 교회질서 69조의 규정이다. 그것은 예배 중에는 시편들과 십계명과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사도 신경(12가지 조항의 신앙의 고백)과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와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 이제 족하나이다”)만 예배용 찬송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도록만들어진 것이었고, 다른 것들도 거의 성경에 있는 시였다. 이것들은 제네바 교회에서 이미 사용하던 것이고 제네바 시편가에 속한 찬송들이었다. 화란 개혁파 교회가 칼빈과 제네바 교회의 전통을 매우 중시하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O God wat ons Vader is, Oh God! who art our Father)이라는 찬송은 각 교회 공동체가 사용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모든 찬송들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 찬송들의 일부가 이미 사용되고 있는 교회들에서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통해”(by the most suitable means) 그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일단 이 조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칼빈이나 화란 개혁파 교회나 예배 중에 오직 시편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먼저 주목해 보아야 한다. 대부분은 시편들과 같이 성경에 있는 영감된 기도들을 사용하여 찬송하도록 하였지만, 사도신경과 같이 성경에 직접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도 사용하여 찬송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시편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주 제한된 입장에서 예배용 찬송을 규정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불려져 아주 익숙한 !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Oh God! who art our Father)에 대해서는 각 교회 공동체의 결정에 맡기면서도 나머지 찬송들은 모두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것을 질서 있게 제거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번째 요소이다. 더구나 얼마 후인 1638년에 이 조항을 수정하여 "절기 때에 부르는 몇몇 찬송을 사용하든지 아니든지는 각 교회 공동체의 자유에 달려 있다"고 개정하였다.

     

    이를 우리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 할까? 일단 그 기본적 정신이 예배에 적합한 찬송을 규정하려고 했다는 데에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 원칙을 생각하면 결국 예배에 적합한 찬송을 온 회중이 함께 찬송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라고 여겨진다. 그에 대해서 너무 엄격한 예를 적용해서 오직 시편만 해야 하나고 했다는 것은 사실에서 어긋나고, 또 너무 완화된 이해를 적용해서 어떤 찬송이든지 허용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예배에 가장 적합한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제네바의 예와 그것을 그대로 고수하는 화란 개혁파 교회의 예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와 회란 개혁파 교회와 미국 교회들에 시편가와 찬송이 다 사용된 것도 참조해야 한다. 이때 예배에 적합한 찬송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손상되지 않았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 찬송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혼인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7세기 초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는 혼인식을 하는 데 다양한 방식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혼인식을 하는 방식에서의 통일성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이전의 교회의 규례들이 이제까지 규정하던 것에 일치하는 방식을 따라야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 속한 시일 안에 국가의 권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규례를 만들어야하는데, 이 때 목사님들의 권고를 받아서그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도르트 교회 질서 제70).

     

    이 규례는 한 편으로는 천주교회에서 혼인식으로 교회의 예식으로 따라서 성례로 이해하던 것을 배제하면서, 그러나 또 한편으로 혼인식이 성례가 아니라고 해서 교회와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두 측면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첫째로, 혼인식은 성례가 아니다. , 천주교회가 말하는 혼배성사(婚配聖事, 또는 근자에는 혼인성사라고도 한다)는 성경이 그렇게 규정하지 않은 것을 성례로 인간들이 만든 것이므로 잘못된 방식으로 혼인을 이해하고 시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거행된 혼인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규정한 방식으로 무시하고 인간들이 자신들의 규례를 만들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규례인 것 같이 한 것이다.) 혼인을 (1) 영원한 성사(聖事), 즉 성례라고 이해하는 것이 비성경적이고, (2) 이 때 사용되는 반지에 대해서 사랑과 신의의 표지로 서로 주고받는 이 반지에 주님 친히 (성호를 그으면서) 강복하소서.”라고 하든지 혹은“(성호를 그으면서주님, 당신 이름으로 축복하는 이 결혼반지를 (성호를 그으면서) 강복하시어, 이 반지를 끼는 신혼부부로 하여금 성실하게 서로 신의를 지키고, 주님의 뜻대로 평화 속에 머물러 서로 사랑하며 일생을 지내게 하소서.“라고 말하면서 반지에 축성하는 것이 잘못이며, (3) 이 혼인식에서 성찬을 하며 그것도 제사로 하는 것이 문제이다.

     

    둘째로, 또 다른 극단으로 나아가 혼인식은 순전히 시민적 의식(civil ceremony)이라고 하면서 교회와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사회의 권위자들, 시장이나 법관들이 주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도르트 교회질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나름의 통일된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전의 교회의 규례들이 이제까지 규정하던 것에 일치하는 방식을 따라야한다고 하고,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권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규례를 만들어그에 따라서 혼인식을 해야 하는데, 이 때 목사님들의 권고를 받아서그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혼인식으로 국가와 사회와 관련된 것이고 성사(聖事)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그래도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그리해야 하는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도 목사님들의 권고를 따라서 규례를 만들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라의 통치자들과 권위자들도 다 신자들인 그 당시 상황에서 적절한 규정이었다.

     

    그렇지 않은 우리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혼인은 도르트 교회질서가 잘 시사하듯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일이며 교인들로서는 교회적으로도 중요한 일일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혼인하면 국가에 혼인 신고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인정해 주시는 것 없이 혼인하는 것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혼인하는 것이지, 엄격한 의미에서 제대로 된 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혼인식을 예배로 하든지, 아니면 사회적 예식으로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짝지어 주시며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임을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해야 한다. 종교개혁 당시 혼인식이 예배가 아니라는 언급이 나온 것은(바로 이런 배경에서 17세기에 혼인식이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당시에 예배를 미사로 이해하는 배경에서 혼인식은 미사가 아니라는 강조하는 말이었지, 이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하던 말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는 혼인 예배라는 말이 일반화되어 있으므로 이를 예배가 아니라고 굳이 말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것을 더 강조하야 한다. 따라서 혼인식에서 하나님의 주체되심이 더 강력히 드러나야 한다. 신랑 신부나 양가나 주례하는 분이 중심이 아니고, 시랑 신부가 부부가 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양가와 주례자가 그 일을 수종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하는 것이고 소위 하객(賀客)들은 그저 축하하는 사람들만이 아니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일에 대한 증인(證人)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였음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혼인식에서 성찬으로 한다든지 일부 성공회에서 그리하듯이 신랑신부와 주례자만 성찬을 한다든지, 목사의 술로 둘을 묶는 상징적 행위를 한다든지 하는 일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나가면서: 규정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교회 회의체의 규정들 가운데 소위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 즉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은 문제에 대한 규정이 있을 수 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명확히 규정을 하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그 문제에 대한 성경의 원칙을 기본적으로 따르면서 한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둘 다를 존중하면서 있을 수 있는 문제를 당시 교회 정황 가운데서 하나로 정하여 일종의 외적인 통일성을 부여 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모여서 결정한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모든 교회는 항상 보편적으로 이렇게 믿고 이렇게 행하여야 한다고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능성이 다 허용될 수 있는데 그금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보이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결정한 것인지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난번에 다룬 문제들 가운데 성찬의 횟수 같은 것이나 주일 오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강해해서 매년 한 번씩 이를 다 다루어야 한다든지, 또 이번에 다룬 문제들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는 한 지역에 있는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이렇게 결정한 것이지 모든 시대의 교회는 항상 이렇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결정한 것은 아닌 것으로 여기되, 그 정신은 존중해야 한다. 제네바 교회에서 찬송하던 찬송들을 존중하되 오직 그것들만을 예배 중에 사용해야한다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이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단지 여기서 예배에는 예배에 적합한 찬송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큰 원칙을 잘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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