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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
    신학이야기 2022. 9. 1. 21:18

    기독교 신앙의 성격을 생각하는 6번째 시간으로 이번에는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한다. 이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신앙의 형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먼저 단순하게 성경에 가장 충실한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를 제시해 보고, 그것이 과연 역사 중에 제시된 어떤 신앙 형태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율법은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율법은 인간들이 죄를 범했음을 아주 분명히 드러내주고 그 죄의 결과는 결국 폭 넓은 의미의 죽음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드러내준다. 그래서 율법의 중심에는 희생 제물의 죽음이 있다. 인간의 죄가 없었다면 희생 제물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타락한 상태에서 희생 제물은 결국 인간의 죄 문제를 밝히 드러내고 이 죄 문제를 인간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드러내면서 인간 대신에 다른 것이 대신 죽어야 한다는 대리 속죄의 원리를 나타낸다. 구약은 다른 것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우리의 자리에서 죽는다는 원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밝히 선언하는 바에 의하면, 구약 율법에 따라 드리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10:4). 또한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한다”(10:11). 구약에 황소와 염소의 피는 결국 장차 올 다른 것을 지향하게 하며 그것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10:1)고 선언하였다. 구약의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이다. 여기 그림자와 모형으로서의 구약 율법의 의미가 드러난다. 신약에 이루어질 장차 올 좋은 것이 원형’(archtype)이고 구약에 있는 것이 모형’(type)이라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모형의 의미를 잘 드러내면서 원형을 명확히 밝히는 작업을 좋은 의미의 모형론(typology)이라고 한다. 이는 잘못된 의미의 모형론이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과거에 많이 시도된 잘못된 모형론을 극복하고 바른 모형론을 분명히 정립하고 드러내는 것이 교회의 큰 과제이다.

    예를 들어서, 라합의 집에 내려놓은 붉은 줄(2:15-21)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 대한 모형을 본다든지, 심지어 야곱이 끓인 붉은 색의 죽(팥죽)이 보혈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 성문 중의 하나인 양문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 하는 등 수 없이 많은 잘못된 모형론이 시사된 바 있다. 성경해석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가 이런 잘못된 모형론을 극복하는 것이다.

           바른 모형론은 구약에 있는 것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을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지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희생제사가 결국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는 믿고 잘 설명해 왔다. 이 때 히브리서를 비롯한 신약의 문서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약 성경에 명백히 시사가 있는 것이 바른 모형론의 좋은 토대가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 같은 명제를 강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2.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어졌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주장이다. 율법이 지향하던 바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교회는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te,loj no,mou)이 되시니라”(10:4,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고 고백했다. 마침이라는 말은 그 때까지 지향해 오던 것, 그 목적(te,loj)의 성취라는 의미와 그럼으로 그 기능을 다한 마침(end)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다 가진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성취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식과 상징들이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가장 잘 의식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는 이런 자의식을 담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plhrw/sai)”(5:17)고 하셨다. 이 완전하게 한다는 것이 성취와 완전하게 함이라는 의미이다. 그 지향하던 바가 이루어져서 그 풍성한 뜻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구약에서 장차 메시아에게서 이루어진다고 한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니, 바른 그런 뜻에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야단치시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고(24:25-27), 또한 그 후에 다시 나타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24:44) 하시면서 설명하기도 하셨다. 구약에 메시아에게서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이 다 이루어 졌다는 의미다.

           또한 구약이 지향하던 그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종국적 성취였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19:30)라고 하신 풍성한 뜻의 한 부분이 이렇게 그에게서 율법이 지향하던 것이 다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이런 성취를 잘 의식하였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10:19-20)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3. 율법 성취의 함의

     

    벨직 신앙고백서를 처음 작성하고 고백한 분들도 우리들은 율법의 의식들과 상징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쳐졌고, 그 모든 미리 보여 줌이 그쳐졌다고 믿는다고 고백했다(벨직신앙고백서 25,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구약 시대에 율법의 의식들과 상징들이 해 오는 그 역할이 이제 그쳐졌다는 말이다. 따라서 율법의 의식들과 상징들의 사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더 이상 할례를 하지 않으며, 유월절도 지키지 않고, 구약 율법이 먹지 말라고 했던 돼지고기 같은 것을 먹는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셨으니, 이제 신약 교회는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0:18)는 말씀을 신약 교회는 참으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는 제사를 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이 우리의 제사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하는 예배를 제사라고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교회가 참으로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임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도 하지 않고, 예배당 앞부분을 제단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을 하면서 제단에서 성찬상으로 개념을 전환하였다. 그리고 좀 더 충실한 분들은 예배당 안에서 촛대와 십자가도 제거하고 영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율법에 언급된 것들을 신약에 그대로 가져 와서 계속하려고 하는 것을 극복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취된 유월절을 다시 지키자고 하는 분들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도 성취되어 이미와 아직 아니의 구조 속에 있는 안식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인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자고 하는 안식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성취를 제대로 인정하는 않은 것임이 분명하다.

     

              4. 그리스도인에 대한 율법의 의미

     

    그렇다면 신약 성도들은 구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가? 그렇지 않으니 일단 구약의 많은 것이 신약의 토대로 있고, 특히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를 지향하게 하는 것이 구약의 의식 속에 있느니 그것을 존중한다. 특히 율법과 선지자로 일컬어지는 구약에 나타난 증언들 가운데 복음 안에서 더 분명히 선언된 것들을 잘 연결시켜 보게 된다.

           둘째로, 구약의 율법에 있는 규례들 가운데 그 정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원 받은 자들의 삶에 대한 규례(rule of life) 또는 삶의 원리(the principle of life)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래서 칼빈을 따르는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의 제3의 용도”, 중생자를 위한 용도를 강조해 왔다. 이 때 가장 쉬운 것은 신약 성경에서 구원함을 받은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는 원리들이다. 이런 데서 성경의 지침을 따라가서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구약에 있는 것들도 그 법의 정신을 잘 생각해서 그것이 구약적 배경에 있는 것을 넘어서 입법자의 법 제정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그 법의 정신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그대로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제3의 용도와 관련해선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규정에 대한 입법자의 의도다. 이것을 찾아내는 데에도 성령님께서 깊이 관여하신다. 주어진 규례의 역사적 상황을 살피면서 그런 식으로 규례를 주신 의도를 드러내려고 해야 한다. 그 기준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구약과 신약에 있는 규례의 진정한 의도가 하나님의 뜻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둘째는 그것을 행해 나가는 동기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속된 자답게 살려는 것이다.

             셋째는 그렇게 행해 갈 수 있는 힘이신 성령님이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으니, 성령님의 힘주심과 함께 하심으로 온전함(integrity)를 가진 하나님의 의도에 부합하는 삶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의 함께 하심으로만 가능하다.

     

              나가면서: 이런 성경적 이해를 가장 잘 표현하는 신앙의 체계는?

     

    중요한 것은 여기서 제시한 이 원칙을 따라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해하고, 이에 근거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 길로 나아가고자 하면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기독교적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성경을 바로 해석하면서 성경적 방향을 나아가는 것은 다 의미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서로를 받으면서 서로 격려하면서 더욱 그런 방향을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걸어온 길을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면, 과거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율법을 다 성취하셨음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 분들이 잘못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후에도 일종의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분들과 또 이제는 그 어떤 법도 우리를 규제하지 않는다고 하는 반법주의 주장도 잘못임을 말해야 한다. 참된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반법주의도 아니다. 성경임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실현해 나가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추구하고 이것을 이루어 가려고 애쓰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제3의 용도를 강조하시던 분들이 이를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 보다 좀 더 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교회의 예배 의식을 제사와 가깝게 이해하여 여러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 아님을 잘 알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그 앞부분을 제단이라고 하지 않으며, 그 위에 십자가나 촛대를 놓지 않으려 하는 분들이 성경의 정신을 제대로 깨달아 나가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에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늘 바른 방향으로 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이런 방향으로 나가면서, 이런 신앙의 양태를 과연 누가 잘 드러내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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