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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2): “그러나 신앙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신학이야기 2022. 4. 29. 15:16
<세계관> 5월호에 실린 글을 여기도 올려서 더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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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구속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기독교 신앙은 그 대상과 믿음의 내용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믿는 것을 출발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무한히 많은 내용에 대한 탐구로 나간다고 했다. 그러므로 주관적으로는 믿음이 매우 강조된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 이렇게 믿음을 강조하면서, 성경대로 믿는 우리는 동시에 “그러나 신앙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도 강조한다. 성경을 따라서 믿는 바에 의하면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이 문제를 오해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기에 이를 다시 강조해야 한다. 신앙을 가장 강조하는 우리들은 동시에 “그러나 신앙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강조한다.
도구로서의 신앙
신앙은 그 자체가 무슨 기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그저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특히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에게 의존하고 그를 믿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속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는 신앙은 그저 도구일 뿐임을 강조한다. 이런 신앙은 여러 기능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이다. 사실 기독교계에서 신앙이라는 말을 쓸 때는 항상 기독교 신앙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기독교 신앙”이라고 반복해서 말하지 않아도 “신앙”이라고 하면 “기독교 신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끌어안아(embrace) 오직 그만을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고 그가 이루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신비한 연합의 의식적인 결과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꼭 붙잡는(embrace) 것이다. 그가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그만을 끌어안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신앙은 우리의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신앙은 다른 것들과 함께 인간이 하는 것의 한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이 신앙에 근거해서 다른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니든지, 아직 온전한 것이 아닌 참으로 연약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이 있기 전에는 결국 불신앙에 근거해서 다른 모든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타락한 인간들은 다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의식한 사람은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다른 모든 것을 하며, 그 전에 그리하지 않던 모든 것을 죄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하지 않던 모든 것을 죄라고 한다. 여기서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바울이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라고 선언하는 그 의미를 알고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기 이전에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죄라고 할 뿐만 아니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이 기독교 신앙의 성격에 부합하게 (즉,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다 죄라고 한다. 항상 자신을 살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있는 지를 살핀다. 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피곤하고 지루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하는 참으로 역동적인 삶이다. 그렇게 참으로 느끼고 사는 것이 생동력 있는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둘째로, 신앙은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는 수단이다. 아니 (기독교) 신앙은 그저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 with Christ)라고 할 수도 있다. 매순간 그리스도와 교제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이렇게 신앙은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이 그리스도와 교제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제한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고집을 부리고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아니다. 혹시 아주 어려서 그런 모습을 가진다 할지라도 정상적 신앙은 그런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한다. 아무데서나 땡깡 부리며 몸부림치는 어린 아기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조금 성장하면 그렇게 하지 않지 않는가? 물론 요즈음 “성인 아이”(adult baby)들이 점점 많아지는 기현상을 본다. 그러나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직감한다. 그런데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와 같은 “성인 아이”들이 너무 많은 것을 목격한다. 결국 그러 이들에게 “성장하라”(grow up)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신앙 역역에서도 성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결국 그를 주님(the Lord)으로 그리고 왕(the King)으로 모시는 교제이지, 그를 부리거나 그를 그저 마음의 위안으로만 삼는 그런 교제가 아니다. 진정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그 분의 뜻을 배우려 하고, 그 분의 뜻에 따라 가려고 성령님에 의지해서 애쓰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참으로 애쓰는 그 애씀(the striving)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이것은 그저 그 분에게 의존하는 사람의 정상적 모습이지 이 애씀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이 천주교의 가르침과 개신교의 성경적 이해의 차이다. 천주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들은 은혜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고 애쓰게 되는데 그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공로로 인정하시거나(congruent merit, meritum inadœquatum sive de congruo) 급기야는 지당한 공로(condign merit, meritum adœquatum sive de condigno)가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참으로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개신교도들은 우리가 은혜에 근거해서 애쓰는 그 애씀으로도 우리가 모두지 하나님 앞에 설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한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시다.”
겉으로는 천주교인들도 이 말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라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만일에 우리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진정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의”+ “우리의 의”가 구원을 이룬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다. 그 동안 역사 가운데 이런 식으로 처음에 우리가 거부한 우리의 의를 뒷문으로 은밀히 이를테면 밀수해 들인 일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즉 뿌리에까지 내려가서 생각하면 이 이상한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모든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도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성령님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타락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것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다음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바울도 이에 동의하면서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구약 시대에도 인간의 타락한 정황을 정확히 인식하면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라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의가 다 더러운 옷 같다면 우리의 의롭지 못한 것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10:3)라고 정확하게 고백했었다. 우리 스스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믿기 전에는 물론이거니와 믿은 후에도 그러하다. 우리가 잘 했다고 하고는 것도 하나님의 성결하신 판단에 의하면 옳은 것이 아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4-6).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제대로 한다고 한 것으로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그것만이 우리의 의
바론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자신에 서시어”(for us and in our place)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다 받으시고,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다 행하셨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자리에서 행하신 모든 거룩한 일들과 그의 공로를 모두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의(義)라고 한다. 다른 것도 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온전한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충족성(sufficiency)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가 행하신 것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우리가 그를 믿는 믿음조차도 그것이 칭의의 원인이거나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을 받아들이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참 신앙이 있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 신앙의 성격상 우리의 신앙은 매우 적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뒤로 숨는 성격을 지진다. 신앙은 그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 내용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신앙이 없이는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참 신앙을 그 자체를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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