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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자가와 속죄(2)
    신학이야기 2022. 3. 8. 19:39

    <월드뷰> 261 (2022년 3월호): 108-12에 실린 글로 여기도 올려서 더 많은 분들이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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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와 속죄 (2)

     

    지난달에 생각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의미를 계속해서 생각해 보자. 이번에는 그의 십자가 죽음의 사실을 그 의미와 함께 생각해 보자. <벨직신앙고백서 21>이 잘 표현하는 바와 같이 그는 그 자신이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셨고(69:4 참조),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위해서’(벧전 3:18) 그의 몸과 영혼의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한 두 가지 강조

     

    여기서는 두 가지가 특히 강조된다. 첫째는, 지난번에 살펴 본 것과 같이, 이것이 불의한 우리를 위해 그가 대신 당하신 고난이라는 것, 따라서 그는 잘못한 것이 없으시고 그는 의로우신데 우리의 불의와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대신해서 그가 형벌을 받아서 우리가 그 죄에서 벗어나는 대리 속죄, 즉 대속(代贖)의 가르침이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진다.

     

    둘째는, 그의 고난이 그의 인성이 당한 고난임을 아주 분명히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를 같이 언급해야 한다. 첫째로, 신성은 고난을 당하지 않으신다는 거의 공리에 가까운 사실의 천명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당하는 고난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신다. 일본 사람의 영향으로 하나님에게도 고난이 본질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일본 구마모토 출신으로 동경연합신학교(Tokyo Union Theological Seminary, 1930년 개교, 1946년에 대학교가 된) 동경신학대학(東京神学大学)의 교수(1949-1984)였던 키타모리 가조(北森 嘉蔵, Kitamori Kazō, 19161998)1946년에 일본어로 낸 ?하나님의 고난의 신학?(みの神學)이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이런 생각이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르게 몰트만이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키타모리 가조를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고난당하셨다고 주장하여 이런 생각을 널리 유행시켰다. 오늘날은 이와 같은 식으로 표현하며 하나님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주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성경에 충실하려고 하며 그런 입장에선 정통적 사람들은 하나님과 신성은 고난 받지 않으신다(the impassibility of God)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다. 또한 이런 논의가 가진 심각한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영향을 받으신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곧바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과거 정통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은 하나님과 신성이 고통을 받으시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히 하였다.

     

    <벨직신앙고백서>도 그리스도의 영혼과 몸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밝혀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이 당한 고난임을 명백히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성은 그 자체로 고난을 당할 수 없거니와, 인간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고난을 대신해서 받으시는 것이니 그 고난을 인성이 받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가 당하신 고난은 전인적 고난, 그러니 몸과 영혼이 다 당하는 고난이다.

     

    그 중에서 성경은 그의 영혼이 당하신 고난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잔에 내게서 지나가기를 바란다고 했을 때 그는 몸의 고난보다도 그 영혼의 고난 때문에 그렇게 말하셨음을 잘 생각해야 한다. 또한 이 영혼의 고통 때문에 그는 이 문제를 앞에 놓고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22:44) 할 정도였다. 그 고난의 핵심은 그가 십자가에서 하셨던 일곱 가지 말씀 중 제 구시 즈음에 크게 소리 질러 말씀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에 담겨 있다. 물론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든지, 죽음의 그 순간은 인성이 신성으로부터 떨어지는 고난을 경험한 것이다. 성육신 이래로 늘 신성과 함께 하여 신인(神人, the God-man)으로 계셨던 그 분께서 죽음에서 그 몸과 영혼이 분리되시고, 그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고, 아주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위로에서 분리되었었다고 할 수 있다.

     

    죄악에 익숙한 우리들은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조금의 신앙만 있어도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것이라고 정신 차려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가장 온전하신 인간성을 지닌 그리스도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영혼의 고난이었겠는지 생각해 보라.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26:38)고 하시며, 기도를 부탁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종합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이런 지속적인 영혼의 고난과 그에 따라 온 몸의 고난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강조한 인성이 받으신 고난이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죄 값으로 우리가 받아야 하는 고난을 그가 대신 지신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의 생 전체에서와 특히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고난이다. 그 중에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그가 영단번에 이루신 희생제사라고 하였다. 이런 희생 제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첫째는, 그가 우리 대신에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죄의 형벌(the punishment of Sin), 즉 죄의 결과로 우리의 것이 된 저주와 죽음을 담당하셨다. 여기서 대리 속죄의 의미가 현저하게 드러난다. 또한 둘째로 그는 죄의 권세(the power of sin)에서 원칙적으로 우리를 구해 내셨다. 그를 믿는 우리들은 이제 원칙상 그의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다 담아서 그를 구주(Savoir)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나시기 전에 이미 그의 수태를 예고한 천사가 사용하고, 후에 천사가 요셉에게도 한 말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1). 이 말씀이 그가 마리아 태 속에 있을 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에서 예언할 때부터 함의된 것을 분명히 하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한다.

     

    먼저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그에게 속한 백성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도 그렇고, 구약 시대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있을 때도 그렇고, 마리아에게 초자연적으로 수태된 그 분에게 대해서도 그렇다. 그는 계속해서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자기 백성을 위한 분이셨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이 세상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여 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는 분으로 오신 것이다. 그것이 그분이 구주라는 말의 뜻이다.

     

    오늘날 곳곳에서 다른 구주를 생각하고, 다른 의미의 구주를 생각하는 이 시대에도 이 것은 분명한 사실로 서 있다. 그만이 인간의 근원적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하신 구주이시다. 우리들도 1세기의 사도들과 함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고 선언해야 한다.

     

               참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제까지 언급한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속을 참으로 믿는다면, 이 영단번에 이루어진 구속을 참으로 믿으면 이일이 한 번의 온전한 희생제사를 하신 것임을 생각하면서 이것이 우리를 영원히 온전하게”(perfect forever) 하셨음을 믿어야 한다(벨직 신앙고백서 21).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이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한 것임을 확신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셨으나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서 후에 달라 될 것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끼여 들어서는 안 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전응하신 힘으로 이루시는 것이다. 그가 시작하셨고, 그가 지금도 이일을 이루시고, 그가 후에 온전하게 하실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을 행해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와 같이 한 말이 우리의 확신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방종의 길로 나갈 수 없다. 오히려 주께서 무엇을 바라시는 지를 늘 바라보며 그가 이루실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둘째로, 영원히 온전하게”(perfect forever) 하셨다는 것이 원칙적으로(in principle) 그렇게 하셨다는 말임을 주의해야 한다. , 우리에게 그렇게 못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이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임을 믿으면서 계속 주께서 원하는 길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다(고전 2:2). 이 말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른 것들은 이와 비교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시 바울과 함께 모든 것을 해로(as loss)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3:8)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를 위하여 산다.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함이다. 이와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만이 모든 것이다. 자기들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땅히 그런 상태에 이르는 것을 바르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참으로 믿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상처에서 우리의 모든 위로를 발견한다”(“find all comforts in his wounds” - 벨직신앙고백서 21). 다른 위로를 다른 곳에서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도 얻고 그와 함께 다른 것도 얻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에 머무르는 사람이다. 특히 앞서 말한 유일한 영단번에 이루어진 희생 제사 외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시킬 다른 방도를 추구하거나 창안해 낼 이유가 없다”(벨직신앙고백서 21). 십자가 구속에 더하여 우리가 더 하나님께 화목되거나 가까워지기 위해 할 일이 있다고 하거나 십자가를 더 현실화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세 때 미사에 대해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을 생각하면서 이와 같은 것을 추구해 가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믿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늘날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구원의 길도 용인하려 하거나 십자가 구속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처럼, 또는 그와 비슷한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참으로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임을 21게기에 사는 우리들도 분명히 천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가 달리신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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