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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자가와 속죄(1)
    신학이야기 2022. 2. 5. 16:21

    <월드뷰> 260 (2022년 2월호): 110-13에 실린 글을 여기도 실어서 더 많은 분들이 읽어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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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믿는 바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점거해가는 중이다. 지난번에 성육신은 그 다음에 오는 모든 일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성육신의 결과로 있게 된 것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진 일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십자가 사건 자체

     

    <벨직 신앙고백서>(1561)은 이에 대해서 다음 같이 진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21문답).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맹세하신 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십자가의 나무 위에서 자신을 드리심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그의 보혈을 쏟아 부어 주심으로

    온전한 만족으로 이루어

    성부의 진노를 유화시키시기 위하여,

    우리들의 이름으로 성부 앞에 자신을 제시하셨다고

    우리들은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도다.”

    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끌려갔으며,

    본디오 빌라도는 처음에 그가 죄가 없다고 선언하였으나

    범죄자들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으며,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정죄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 진술에는 사건과 의미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우선 그 사건 자체를 생각해 보자.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의 생의 마지막에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정죄함을 받으시고,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사건이다.” (1) 메시야가 (2) 정죄함을 받고 (3) 나무에 달려 죽었다. 이 사건을 신약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26:6-27:61//14:3-15:41//22:7-23:56//18:1-19:42) 아는 것이 십자가 사건 자체를 아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세 가지가 다 걸림될만한 사건이었다. (1) 메시야가 죽다니, 그것도 (2) 정죄함을 받고 죽다니, 더구아 (3) 나무에 달려 죽다니(21:23) - 유대인들은 십자가 사건 자체에 걸려 넘어질 만한 형태로 이 사건이 일어났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1): “한 영원한 제사

     

    이제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다음 같이 믿는 데서 기독교가 이 땅에 있게 된다. 다음 같은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에 기독교는 없는 것이 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 말을 우리가 믿는 것이 어떤 기여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믿게 하셔서 당연히 다음 같이 믿는 사람이 이 땅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십자가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서 감당하신 일이시다. 특히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이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이고 레위 지파 중에서 아론의 후손에 속한 분이 아니기에 아론의 후손들이 24반차(class)에 따라 섬기는 제사장이 아니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머릿속에 아론 계열이 아닌 제사장으로 이미 각인된 존재가 있었다. 그는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마치 후에 제사장이 받듯이 십분의 일을 받은 멜기세덱이다(14:17-20; 7:1, 6). 더구나 시편 110편에서는 이미 다윗이 성부 외에 내 주라고 부른 분에게 하나님 오른 쪽에 않아 계실 것임을 분명히 하시면서(110:1), 다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셨다(11:4).  

     

    이를 생각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역사에서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본다고 하면서(7:15),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7:11)고 논의한다. 또한 시편 110:4의 말씀을 언급하면서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고 있다(5:6; 7:17).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예수님은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5:10)고 말한다. 또한 성소와 지성소를 막은 휘장을 생각하면서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6:20)고 말한다.

     

    이와 같이 창세기 기록에 근거하여 시편 110:4에서 하신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가 자연스럽게 사용한 것 때문에 기독교회 안에서는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시라는 것이 아주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인정되었다. 그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시다(3:1; 4:14; 5:5; 10:21).

     

    이와 같이 참 기독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는 것을 말한다. 역시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셨다”(9:26, 28, 10:10)고 선언한다. 예수님께서 원형의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으니 여기서 구약 모든 제사가 온전히 성취된다. 이 문제 역시 히브리서에서 가장 명료하게 진술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0:12). 이와 같이 메시야가 오셔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렸으니, 이제는 다시 하나님께 희생 제사 드릴 일이 없게 되었다(10:18).

     

                    십자가 사건의 의미(2): “속죄

     

    왜 이런 한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가? 벨직 신앙고백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그의 보혈을 쏟아 부어 주심으로 온전한 만족을 이루어 성부의 진노를 유화시키시기 위하여, 우리들의 이름으로 성부 앞에 자신을 제시하셨다고 믿는다고 한다.

     

    일단 이 일이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이루어진 것임을 우리의 이름으로자신을 성부에게 제시하셨다고 하였다. 형벌을 받으실 때 그의 잘못 때문에 형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가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정죄했을 때, 결국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받으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우리들은 죄를 범했지만, 예수님은 죄를 범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다”(53:9).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형벌을 받으셨다. 여기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다는 인식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이사야가 예언적으로 잘 말한 바와 같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도다”(53:5).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이었다”(53:8).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54:4).

     

    물론 이 세상에서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으로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한다(53:4).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에 계신 주님의 현존 앞에 서기 전에 바울이 정확히 그렇게 생각하였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셨다”(53:3 ).

     

    그러나 실상은 그가 우리의 죄 값을 자신이 짊어지고 형벌을 당하셔서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멀리 치워버렸다(103:12). 역사의 복잡한 과정에 관여되지만 궁극적으로 이 일의 주체는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선지자와 함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53:6)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표현하여,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53:10). 후에 이를 깨닫게 된 베드로도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벧전 2:24)고 고백한다. 여기 온전한 구속이 있다.

     

    이것을 예전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만족을 이루시는 것이라고 표현했었다.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바를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를 만족(滿足, satisfactio)”이라고 표현하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이라고 표현했었다.

     

    그것을 후대에는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다 받아 만족을 이룬 것이라는 뜻에서 속죄(贖罪)”, 즉 죄에 대한 죄 값을 치룸이라고 하였고, 그 만족케 하심 자체는 속상’(贖償)이라고 하거나 우리를 구하는 의미의 속죄라는 뜻에서 구속”(救贖)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죄를 지은 우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심으로 이런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뜻에서 대리(代理) 속죄(贖罪), 또는 이를 줄여서 대속”(代贖)이라고 표현하는 일이 더 일반화되었다.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셨으므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극복된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 진노와 저주를 자신이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3:13)고 말한다. 그렇기에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다시 저주가 없으며예수님의 재림 후에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어서 ...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살 것이다(22:3).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이 우리의 죄 값을 치루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만드는 구속사건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대하여 유화되게 한 사건이다. 그렇게 하도록 드리는 제물을 화목 제물이라고 하던 것을 반영해서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i`lasth,rion)로 세우셨으니”(3:25)이라고 말하고, 요한은 화목을 위한 제물(i`lasmo,j)이라고 말한다(요일 2:2; 4:10).

     

               나가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잘 생각해야

     

    이렇게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는 십자가 사건 자체와 그 의미가 다 중요하다. 십자가 사건을 무시하는 일부 이슬람교도들도 문제거니와 그런 일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일어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문제다. 그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시 십자가형을 당하던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와는 달리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다 지고 가셔서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 죄를 씻으셔서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죄값을 다 치룬 메시야의 죽음으로 그 십자가에서 속죄가 이루어지는 대리 속죄, 즉 대속의 자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십자가와 속죄의 의미에 충실해서 미사를 폐지하게 한 사람 중 한 사람인 울리히 쯔빙글리, 쯔빙글리의 도시라 할 만한 츄리히의 소위 물 예배당( Wasser Kirche) 앞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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