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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기독교 리더십
    우리사회와 기독교 2009. 11. 6. 17:51

        <신앙 세계> 11월 호에 기고한 글을 소개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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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기독교 리더십                               

          1.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많은 분들은 오늘날은 세계가 그물망으로 연결된(world wide web) 세계화 시대(global age)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어서 어제의 새로운 지식이 오늘은 모든 사람들에게 빨리 공유되는 정보 시대(information age)라고 하기도 하며, 많은 이들이 자본과 효율을 쫓아 살아가는 시대라고 보기도 하고, 따라서 한 곳에 정착하기 보다는 여러 곳을 정처 없이 살아가는 유목민적 시대(nomadic age)라고 하기도 하며, 이런 시대에는 과거의 주류 집단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보았던 것에 저항하는 이들이 많아져서 이제는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시대(post-modern age)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는 한 지도자가 있지 않고, 다양한 지도자들이 있고, 한 분야의 지도자가 모든 이들을 다 주도할 수 없고 모든 이들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쉽게 되고, 또 그 영향력을 쉽게 잃게 되기도 하는 시대이다. 지도자가 많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지도자가 없는 시대이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리더(leader)가 되려고 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 사회의 고전적 문제점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런 인간의 타락상이 좀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조그만 어떤 특질이라도 있으면 모든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비판하면서도 따라 가려고 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그러하다고 우리 주께서 이미 오래 전에 말씀하신 바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 20:25). 이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남들 위에서 권세를 부리는 자들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여져 간다. 그래서 다들 리더가 되기를 원하고, 따라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리더십에 대한 책들이 이 시대에 그렇게도 많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기도 하다.


          2. 이런 상황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의 상황은?


    기독교인과 기독교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그런 영향력을 세상에 미치려고 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기독교가 사라지게 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따라가는 세속화(secularization)의 한 측면인 것이다. 물론 그리할 때에 외적으로는 무엇인가 일이 되는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진정한 기독교는 이 세상에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이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도 이 세상 안에서 큰 영향력을 드러내면 살려고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선택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이 세상의 헤게모니(hegemony)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 되므로 자신들이 헤게모니를 잡아 우리를 지배해 보려고 하는 다른 이들로 구성된 이 세상과 충돌하게 될 것이고, 결국 사회 과학에서,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이론가들이 말하던 헤게모니 이론(hegemony theory)이 옳음을 우리의 행동 양태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 이것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이 세상은 매우 의아해 하고, 우리들도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약자의 도덕이고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며, 결국 강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주관하도록 내어 주는 것이 될 것이라고 온갖 핑계를 대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조차도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선뜻 동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특히 근자에 한국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내는 태도 속에서는 우리의 영향력을 이 세상이 무시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영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매우 심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 속의 주류에 속하기를 원하고, 주류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이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그런 태도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를 스스로 의문시해 보아야만 한다. 진정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을 존중한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도전하시는 지를 깊이 있게 숙고하고 이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요점이 있으니,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충돌하는 것을 막고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겸손하려고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의 겸손과 자기 노력에 근거한 섬김을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이 자유주의적 기독교 이해를 이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의 기본적인 생각이 바로 인간들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바꾸어 가서 보다 온전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루신 십자가에서의 구속 밖에는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다. 그가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으로서만 개개인의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고, 각각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문제도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구속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 있어서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과 사회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삶과 죽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 주님께서 이 세상에 섬기려 오시고, 그것도 죽기까지 섬기려 오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자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 섬기는 일에로 나아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주님을 참으로 믿는다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태도여야만 한다. 만일에 그리하지 않는 것은 진심으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이런 사회 변혁 방식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회 변혁 방식에 동의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의지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무력해 보이고, 지혜 없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사회 변혁을 말하는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이 세상은 미련한 것이며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고 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십자가 복음에 걸려 넘어졌었다(고전 1:23).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것이 절대적 진리라는 말을 거부하는 오늘날의 반응은 이미 오래 전 사람들의 반응의 연장이요 변형 형태일 뿐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의도와 예수님께서 이루시려 하시는 변혁을 믿는 것이냐 하는데 있다. 오늘날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식으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며 그러니 사회가 변화될 리는 없다고 심중에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많은 교회들조차 그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심리적 요법을 찾기도 하고, 그룹 다이나믹스(group dynamics)를 찾기도 하며, 고객의 수요를 중심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꿀 준비를 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배가시키고 증진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 헤맨다. 이런 노력 앞에서는 예수님의 의도도, 성경의 가르침도 제쳐 놓아지는 일이 많다. 결국 우리들은 예수님의 리더십을 따라가지 않고, 이런 저런 다른 이들을 따르면서 스스로가 지도자가 되고 지도력을 발휘하기 원하는 것이다. 세상이 리더(leader)가 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리더(leader)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기독교 리더십을 말하는 데에 그런 유혹은 있는 것이나 아닌지를 우리는 항상 반성하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정한 기독교 리더십은 무엇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예수님만 따라 가야 한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떤 다른 리더들을 따라 가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 + (누구) 식의 생각이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생각도 존중하면서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다른 이들의 가르침도 같이 따라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만 의존하면서 성경에 근거하여 노력해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외의 다른 리더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들에게도 아이러니컬하게 리더가 있는 데, 그것은 철저히 예수님과 성경의 가르침만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럴 때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했던(고전 4:16, 고전 11:1, 살후 3:9) 바울의 말이 의미 있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비밀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라는 바울의 말에서 찾아 질 수 있다(고전 11:1). 진정한 기독교 리더십의 비결은 이렇게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라 가는 데에 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방도를 받아들이고 이를 세상 구원의 유일한 길로 제시하는 예수님과과 사도들의 말을 따라 가야 한다.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와 내포주의(inclusivism)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려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저주를 받아 죽으신 십자가만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이 세상이 살 수 있는 길이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는 말을 철저히 신봉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만을 따라 가야 한다. 그리하지 않고 때때로 십자가에 대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당히 양보하며 절충하면서 있을 수 있는 기독교 리더십은 있을 수 없다.

     

        둘째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특별 계시의 빛에서 온 세상이라는 일반계시를 제대로 해석하면서 이와 같이 오직 성경의 빛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며 선양해 가는 곳에 기독교 리더십이 있다. 여기에 모던주의(modernism)적 가르침과 포스트-모던적 가르침(post-modernism)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셋째로, 그러나 실천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요점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사랑하며 섬겨 가는 곳에서만 기독교 리더십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이 말하는 섬김의 리더십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섬김이 이 세상이 말하는 섬김의 리더십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리더십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되겠는가?

     

        여기서 다시 강조한다. 이런 섬김의 리더십이 기독교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알버트 쉬바이쳐(Albert Schweizer, 1875-1965)는 진정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섬겼었다. 그의 철학을 가지고 말하면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성명을 진정 섬기기를 원했다. "생명에의 외경"(a reverence for life)을 가지고 살고 실천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자 절망하고 죽어갔다고 말하는 그는 기독교적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그는 기독교 리더십을 가진 분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섬김의 리더십이 기독교적 리더십은 아니라는 것이 이런 데서 잘 드러난다.

     

       인도주의적 노력에 대한 인정을 받아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쉬바이쳐도 따라가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제시하는 기독교적인 것에 따라 오려고 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달리 어찌 할 길이 없다. 우리는 철저하게 성경에 제시된 그대로의 예수님고하 그런 예수님을 따라 간 바울을 본 받아 가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예수님만을 철저히 따라 갈 마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진정한 기독교가 없어지도록 하는 일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기독교 리더십을 생각하는 이들이 실상은 이 세상에 기독교가 없어지도록 하는 일에 공헌하는 것이 된다면 그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상황인가? 우리는 그런 현상이 우리에게 있지 않도록 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 그리할 때에 마치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는 바울을 따르는 이들이 있게 된 것처럼 우리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기독교 지도자가 있게 될 것이다. 너도 나도 다 기독교 지도자라고 자처하고 나오는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적으로 판단 할 때는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진정 우리의 지도자가 아니다. 자신이 전혀 큰 바위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이가 그런 사람으로 인정되었다는 “큰 바위의 얼굴” 이야기 같이 전혀 지도자인연하지 않고 ㅡ 오직 그리스도만을 구주와 주님으로 철저히 따르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참된 지도자로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우리 주님만을 따라 갈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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