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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순 사건과 그리스도인(3)
    우리사회와 기독교 2009. 2. 25. 23:37

    강호순 사건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3):

                      진정한 생명 존중의 길과 이웃 사랑에 대한 생각


    강호순 사건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최종적 생각은 우리들이 이 모든 이웃들에 대해 진정 이웃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들은 우리가 그 사건의 피해자 된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가해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웃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절감하며 우리의 책임을 통감하고 앞으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나타난 여러 대조 중의 하나는 “누가 이웃입니까?”라고 물으면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대상, 우리가 책임져야 할 대상을 축소하려는 인간들의 음모에 대조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고 질문하시는 것이다. 누가 이웃이냐를 묻는 우리들을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대해 어떻게 이웃이 될 것인가?”에로 관심을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이다. 우리가 여전히 계속해서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를 묻고서 우리의 이웃을 말씀해 주시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여 율법에 의도하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겠다고 하면서 우리의 사랑의 축소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제대로 읽고 배운 사람이 아닌 것이다. 무리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진정 이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이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하고 우리만의 길을 재촉한 우리, 그리하여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의 희생자가 되도록 방치한 우리, 치안이 잘 정비되지 않은 지역을 그대로 방치한 우리, 자기들만의 유익을 위해 자기주장을 하기 위해 과격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모든 상황을 방치한 우리, 하루에도 33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할 때에 그들을 보듬고 잡아 주지 못한 우리를 보고, 우리는 우리의 이웃되지 못함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우리들은 우리들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으며 그것은 그것을 감당할 사람들이 자기 책임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리의 책임을 전가 하려고 하기 쉽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영역에서 그래도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면서 나름의 노력을 해 왔다고 자기 위로와 자기변명의 말을 하려고 하기 쉽다. 그것이 사실 일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는 특히 어려움이 처한 사람들을 잘 대해 주려고 애썼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믿는다고 하는 이들의 자살 빈도나 다른 문제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잘 했다고 말하려는 것의 자신감이 많이 줄어든다. 우리의 모습을 솔직히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음에 대해 깊이 있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조금 잘 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스스로 잘 살아 온 것을 자지고 자기 위안과 변명을 하려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잘 한 것조차도 다 박탈되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조금 잘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생각하거나, 더구나 그것을 나발 불지 않도록 하기로 하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는 무익한 종일뿐이다. 더구나 현실의 우리는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잘 하지도 않는 그야말로 무익한 종보더 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모습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해도, 지금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찾고 유리들의 편리를 위해 사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지금 여기서 성경의 가르침과 신문 상에 나타나는 우리의 죄악에 대한 보도 앞에서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바라보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그런 문제 있는 존재들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잘못되었음을 인정한 터 위에서 이제부터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나아가기를 성령님을 의존하여 힘쓴다면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 기독교의 본질의 한 측면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또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강호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호순을 미워하고 그만을 공공(公共)의 적(敵)으로 몰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에게도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현장 검증 때에 그에게 던져진 돌이나, 그는 반사회적인 인격 장애자인 psychopath라는 낙인이 아니라, 그도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려는 마음을 지닌 진정한 선교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때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분들의 마음이 심히 상할 수도 있다. 사실 그와 같이 비참하게 가족을 잃은 분들도 우리의 사랑과 끌어안음과 이웃됨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야말로 우리가 여기서 떠나 처음 만나는 그 사람을 이웃으로 알고 그 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며 사는 방식이다.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으로 알고 성령님께 의존하여 진정한 이웃 사랑의 길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 개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 이 세상은 계속해서 교회를 향해 비판하는 소리를 계속할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힘을 확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우리의 세(勢)를 자랑하는 태도를 나타내면서 사랑은 나타내 보이지 않을 때 언제가 이 사회는 그야말로 교회에 대해서 절망할 수도 있다. 그 때가 되면 이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있다는 것은 그래도 교회에 대한 기대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비판의 말에 저항하기보다는 기꺼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묵묵하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사랑 실천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다음 같은 기도로 이 말씀을 마치고자 한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 소서, 우리의 사랑 없음, 우리의 믿음 없음, 우리의 소망 없음을 책 하시고, 그러나 우리들에게 힘을 주셔서 우리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 하소서. 우리 개개인과 한국 교회가 진정 이 사회 속에서 사랑과 생명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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