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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도래할 '그리스도의 계절'을 바라보는 자신학이야기 2025. 5. 30. 13:20
<월간 목회> 586 (2025년 6월): 58- 63에 실린 글을 더 많은 분들이 보시도록 여기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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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남송 석좌 교수)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사건의 증인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행 1:8). 그런데 증인은 기본적으로 “목격자”여야 한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제 길로 갔을 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12명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의식한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대신을 사람을 찾을 때에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월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하고, 두 사람을 천거하고 결국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 12사도를 완성하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온(행 2장) 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벧전 5:1).
직접 증인과 간접 증인
이처럼 증인은 기본적으로 목격저, 즉 자신이 증언하려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이다. 다음과 같은 요한의 말은 사도들의 의식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우리가 들은 바와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 구절은 1세기 정황에서 가장 온전한 체험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증인이 되었는지를 잘 말하는 구절이다. 또한 베드로도 자신과 다른 사도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라고 말했다(벧후 1:16). 이런 증인들을 직접 증인들이라고 한다. 직접 증인들에는 위에서 언급한 12사도와 그와 함께 하던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속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직접 증인은 아주 소수다. 12사도와 초기 그리스도인들 그들만이 직접 증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직접 증인들의 말을 듣고 또한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화 강동하셔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베드로가 잘 표현하고 있듯이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증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다(벧전 1:8). 이런 사람들은 간접 증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주님을 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주님께서 자신들 안에 일으키신 일을 생생하게 으식하는 사람들이다.
직접 증인과 간접 증인은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였느냐의 여부에 따라 구분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하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 증인들도 보는 것만으로는 증인이 되지 못한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사도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신데, 자신들이 생각하던 메시아 이상의 존재로 예수님께서 친히 드러내신 바와 같이 “신적인 메시아”, 즉 하나님이 아주 독특하게 인성을 취하셔서 친히 메시아로 오신 분이라고 믿게 되었을 때 그들은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직접 증인들의 경우에도 ‘목격함 +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다. 간접 증인들의 경우에는 직접 증인이 목격한 바를 전하고, 성령님에 의해 깨닫게 된 그 사건의 의미를 전하는 것을 믿을 때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전심으로 그리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다해 믿어 간접 제자가 되고, 따라서 간접 증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증인이나 간접 증인 모두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증인이 된 것이다.
증언 내용의 우선성
어떻게 증인이 되었든지 증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그에게 우선성(priority)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증언하는 내용이다. 그 증언 내용을 사도들이 선포하는(‘케루소’) 바라는 뜻에서 ‘케리그마’, 즉 ‘선포된 것’이라고 한다. 사도들이 선포하던 대로 우리들이 믿고(credimus) 우리도 같이 선포한다. 우리는 그저 자신들이 경험한 바를 선포하는 것이어도 안 되고 후대의 영지주의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자신들이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를 선포해서도 안 된다. 사도들이 목격한 것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해하게 된 그 바른 의미대로 선포하는 것을 믿고 또 우리도 같은 선포를 해야 한다. 그 핵심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도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고전 15:3-4), 즉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고 믿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요, 온 세상이 새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선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처음 사도들과 함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선언한다.(Only One Way! No Other Name!)
기독교적 증인은 이렇게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그 의미를 사도들이 해석한 대로 증언하고 제시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적 증인에게서 반드시 일어났어야 하는 일
모든 증인에게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바울이 고백한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이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서 그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게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옆에서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일어난 일과 내가 전도한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의 본질은 같은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다른 양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되지만 결국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약동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증인의 삶이다. 매일 매 순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력이 내 안에서 약동하여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여 나가고, 그런 세월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뜻 전반에 대한 이해가 더 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이 성령님에 의해서 공급되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롬 8:4)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해 가려고 애쓰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하는 의식이 전혀 없이 주께서 행하라고 한 일을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행했다고 의식하며 산다. 그러니 그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잘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바로 이런 데서 과연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가 성령님이심을 알게 된다.
어떻게 증언하는가?
증인인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과 말로 이 세상이 유일하게 제대로 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내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밖에 없음을 증언한다. 구원의 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라는 것은 그저 개인 영혼이 이 방식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없다. 그런데 기독교적 증언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이 십자가와 부활을 길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주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를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문제를 가장 명료하게 직시하면서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임시 방도이거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것인데) 오히려 문제를 더 만드는 일이 될 뿐임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서 궁극적 해결을 위한 유일한 길은 이 십자가와 부활을 길 뿐임을 온 세상에 증언해야 한다.
제일 효과적인 것은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최선을 다해서 잘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의 이 말을 듣고 주님을 믿는 데로 나아오지 않는 일이 많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때를 얻거나 못 얻거나 자신이 깨달은 부족한 대로의 내용을 잘 전해야 한다. 성탄절이나 부활절 즈음이 이런 말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좋은 음식을 마련해서 잘 대접한 후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면 적어도 손상되지 않은 복음의 이야기를 전 국민들이 이즈음에 한 번씩은 듣게 된다. 그것을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면 우리는 형제와 자매를 얻을 수 있다.
그들과 함께 하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주님을 뜻을 실천하는 삶,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그 안에서 약동하는 삶이었다면 이때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가 좀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어도 적당한 때에 우리 이웃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잘 대접하고 그 이런저런 대화 가운데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최소한의 그리스도의 증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과 말로 증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증언 방식이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방도들 동원하고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가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서 전하자. 19세기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하려고 노력할 때 주께서는 19세기와 20세기 초를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의 시기로 만들어 주셨다. 이 어려운 시기, 이 새로운 이교의 시기에 우리는 다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김준곤 목사님께서 잘 사용하셨던 아름다운 어구의 의미가 참된 것이 되게 했으면 한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이 땅에 와서 섬겼던 한부선 선교사 '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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