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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창조된 상태에 대한 바른 이해(1)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 2025. 1. 12. 18:55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11)
처음 창조된 상태에 대한 바른 이해(1)
창조 이야기를 역사적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처음 창조된 상태에 대한 바른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창조된 상태를 역사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분들에게는 처음 창조된 상태에 대한 논의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된다. 오직 처음 창조를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처음 창조된 상태에 대한 이해와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처한 상태(state)와 그 구체적 모습(condition)
전통적으로 처음 창조된 상태를 본래의 상태라는 의미에서 원상(原狀)이라고 하였고, 이를 의(義)의 상태(the state of righteousness)라고, 더 구체적으로는 원의(原義)의 상태(the state of original righteousness)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의의 상태(창조된 상태), 죄의 상태(또는 타락한 상태), 그리고 은혜의(또는 회복된) 상태가 의미있게 다루어졌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은혜의 상태가 원칙상 은혜 가운데 있지만 아직 철저히 온전하게 회복되지는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이 회복된 극치의 상태(ther state of consummation)를 더하여 인간의 네 상태를 말하는 일이 일반적이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표현하기를 시작했다. 타락하기 전 아담은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posse peccare)도 있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도 가졌으나, 타락하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지 못했고(non posse non peccare) 오직 죄를 범할 가능성(posse peccare)만 가지게 되었고, 중생한 사람은 원칙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아직 온전하지는 못하고, 영광의 상태에서는 그야 말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posse non peccare)고 하였다. 후대에 이를 정식화하여 길데 표현한 청교도인 토마스 보스톤(1676–1732)은 본래의 순전한 상태 (Primitive Integrity), 전적 타락(Entire Depravity), 시작된 회복(Begun Recovery), 그리고 극치에 이른 행복 또는 비참(Consummate Happiness or Misery)의 네 상태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카이퍼는 타락한 상태를 죄의 상태라고만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영적인 상태만을 가지고 표현하는 일방적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CG, 1:128). 이 상태들과 관련된 외적인 상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문답과 3문답과 같이 죄의 상태는 또한 비참한 상태라고 타락한 영적인 상태(state)와 그 상태의 구체적인 모습(condition)까지를 잘 표현해야만 한다고 말한다(CG, 1:128). “죄가 독이라면, 비참함은 이 독이 초래한 파괴의 결과를 표현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다른 상태에서도 그 영적인 상태(state)와 그와 연관된 구체적 모습(condition)을 연관시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카이퍼의 제안이다. 각 상태는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모습(situation or condition)을 가진다. 의의 상태 (원의의 상태)에 있는 인간은 에덴 동상에 있는 낙원에 적합했다. 그런가 하면 타락한 인간들은 타락 후에 저주가 깃들은 땅에 적합하다(CG, 1:129). 끝까지 은혜를 거부한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 적합하다(CG, 1:129). 그리고 완전히 의롭게 된 사람들은 하늘 영광에 적합하다.
인간의 몸에도 이것을 적용해서 생각해야 한다. 타락하기 이전의 죄 없는 상태(무죄 상태)의 인간은 고통이나 병이 없는 몸을 가지고 있었고, 타락한 상태의 인간은 고통과 고난에 종속하는 몸을 가지고, 은혜를 끝까지 거부한 상태의 인간은 정죄의 몸(a body of damnation)을 가지고, 온전한 거룩의 상태의 인간들은 영화된 몸(a glorified body)을 가진다(CG, 1:129). 몸만이 아니라, 감각, 지식과 의지의 능력 등등에도 이와 같은 것을 적용할 수 있다. 처음 창조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적합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무엇 하나 창조의 규례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다(1:129). 카이퍼에게 중요한 것은 창조의 규례였다.
처음 창조된 상태인 원상
처음 창조된 상태를 뜻하는 “낙원”(paradise)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3번 나타난다(CG, 1, 15. 2=CG, 1:129). 누가복음 23:43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한 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과 고린도후서 12:3-4에서 바울이 몰아(沒我)적 경험 중에 “낙원에 이끌려 간” 영적 경험을 표현할 때와 요한계시록 2:7에서 에베소 교회에게 그리스도께서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실과를 주어서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실 때이다. 이에 비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솔로몬의 기쁨의 동산을 말하는 아가서 4:13에 나타난다. 창세기 2:8에 나오는 동산이라는 말을 70인 경(LXX)이 “낙원”이라고 번역하여 이 말이 우리들의 용례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면서 카이퍼는 창조 때에는 아직 온 땅이 낙원이 아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CG, 1:130). 이것은 사실이기에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지적이다. 창조 받은 이 땅은 선하고 좋은 것이었으나 그 상태가 바로 “낙원”은 아니었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동쪽의 에덴이라는 곳의 한 곳에 낙원, 즉 기쁨의 동산을 창설하셨다.
특정한 장소로서의 “낙원”(즉, 에덴이라는 곳의 한 편에 창설하신 동산)은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특별한 곳이었다(CG, 1. 15. 3=1:131). 이 낙원은 “기후 조건을 해칠 그 어떤 변화도 전혀 없는” 곳이었다(1:131). 창세기 2:5-6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을 것인지는 논의해 볼 만한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카이퍼의 의도를 존중할 때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에서 더 나가 그곳에서는 “천둥과 번개도 없었다”고 할 때(1:131) 그곳에서 너무 지나치게 나아가는 천재의 일면을 보게 된다. 이것도 창세기 2:5-6에 나오는 “비를 내리게 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에서 나온 추론으로 보인다. 아담과 그 부인이 불쾌하게 여기거나 무서워할 외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전체 환경이 “감미롭고 상쾌하며 기운을 불어넣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1:131). 카이퍼는 이렇게까지 표현한다. “잡초가 자리지도 않았고, 독을 지닌 열매가 있을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온전하게 익은 풍성한 열매를 파고드는 벌레도 없었다.... 동물계에는 평화가 지배하였다.... 물론 모든 것은 우리의 말들이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웠다”(1:131).
본래의 상태에서의 유일한 필요
원상태에 처음 창조된 사람인 아담에게는 오직 한 가지 공허만 느낄 뿐 다른 모든 것은 온전하였다. 그 한 가지 공허는 그가 홀로 있다는 느낌이었다(felt alone)(CG, 1. 15. 5=1:133). “그런 감정이 일깨워진 것이 여인의 창조에 앞선다”(CG, 1. 15. 7=1:135).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함께 사는 삶은 “하나님의 창조의 규례에 포함된” 것이다(CG, 1. 15. 5=1:133). “하나님의 제정에 있어서 사람은 홀로 있도록 규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하도록 규정된 것이다.”(CG, 1. 15. 7=1:135). 그러므로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동물들의 함께 하는 삶이 아담에게 홀로 있음을 더 잘 의식하게 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CG, 1. 15. 5=1:133). “동물들은 본래부터 쌍으로 창조된 것이고, 인간을 처음에 한 사람만 창조되었다”(1:134). 여인은 밖으로부터 남자에게 온 어떤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온 것이다”고(1:134) 카이퍼는 성경에 근거해서 명확히 말한다. 남자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가 아니라 여자도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존재인데, 단지 남자로부터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가장 고귀하고, 가장 친밀하고, 가장 완벽한 통일성을 이 놀라운 창조 가운데서 이와 같이 표현하기 위함이었다”(1:134).
그래서 만드실 때도 여인을 독특한 방식으로 만드셨다. 여인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이라는 말은 결국 여인의 전체 물리적 존재가 땅의 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자의 뼈와 살에서 온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몸이 된 것이라는 말이다(CG, 1. 15. 7=1:136). 이렇게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낙원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걸작품”(a divine masterpiece)이다. 이것이 모든 창조의 긍극적 목적이었다. 온 세상이 이 낙원을 위해 존재하였고, 그 낙원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복 주신 인간들을 위해 있었다. 사람은 피조계의 중심에 있었고, 하나님의 전 창조의 크라운이었다”(1:136). 또한 창세기 2:24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규례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시사한다(1:136).
그 “낙원에서는 결혼식이라기보다는 혼인 관계로 창조됨(a creation in marriage)”이라고 할 수 있다(CG. 1. 15. 7=1:135). 물론 이것을 표현하는 카이퍼의 말도 조금은 지나치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혼인식이라는 의식(ceremony)은 “타락 이후에라야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1;135)고 까지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퍼는 사람은 동물들부터 진화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동물들은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동물들에게서 진화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 준다는 것이다(1:133). 만일에 사람이 동물들에게서 진화한 것이라면 “사회적 충동력은 인간들에게서 더 높은 경지로 나타났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1:33f.). 하나님께서 동물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동물들을 다스릴 사람을 염두에 두고서 창조하신 것이다(CG, 1. 15. 6=1:134).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서는 사람이 처음이고 동물이 그 후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생각대로 창조할 때에는 동물이 먼저이고 사람이 후에 창조된 것이다”(1;134). 사람이 함께 살도록 제정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사회성이 앞으로 있게 될 (그러나 하나님 마음에서는 먼저 있는) 사람의 사회성을 따라 제정하신 것이다”(1:135). 그런데 이를 표현하는 데서 카이퍼다운 생각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은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다”(1:134). 하나님께서 사람과 동물을 비슷하게 만드신 부분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특히 다아윈 이후에 상동 기관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나온 이런 표현이 때로는 카이퍼를 오해하게끔 할 수 있으니,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나가지 말고 이런 카이퍼다움을 그저 용인하는 정도로 머물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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