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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이후 낙원에서 시작된 일반은총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 2024. 12. 10. 18:36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10)
타락 이후 낙원에서 시작된 일반은총
카이퍼는 일반은총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부터 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주 명확히 한다(CC, 1. 13. 2=1:112). 그러므로 일반은총은 인간 타락 이후의 낙원에서 시작된 것이다(1:113). 그러므로 “일반은총의 독특한 성격과 참된 성질을 알려면 낙원(paradise)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카이퍼는 타락 후 낙원 상황에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우문현답으로 제시된 일반은총 논의
카이퍼는 타락 전에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는데, 실상 범죄한 “그날” 인간이 죽지 않았다는 상황을 말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묻는다. 아담이 그날 죽지 않고 거의 9세기를 더 살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1:113). “아담이 범죄한 날 아담은 죽지 않았다”(1:113). 오히려 그가 죽는 것에 대한 형벌의 유예는 상당 기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것이 일반은총의 아주 강력한 행위를 나타는 것이라고 한다(1:113). 죄의 전적이고 직접적인 작용이 일반은총에 의해 억제되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일반은총이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당대의 좋은 구약 주석가인 알더스(Gerhard Charles Aalders, 1880–1961)나 그의 후배 조직신학자인 바빙크(H. Bavinck) 등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던 바이다. 이런 해석보다는 이것을 “꼭 그날 죽는다”는 뜻이기보다는 “반드시 죽는다”를 말하는 히브리어 관용구라고 보는 게할더스의 보스의 견해가 더 개연성이 높은 듯하다.
그러나 카이퍼의 이 해석은 “--하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어귀에 대한 해석으로서는 잘못한 것이지만, 타락한 인간들에게 곧바로 일반은총이 작용하고 있음을 잘 말한 점에서는 참으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석을 잘못해서 ‘왜 그날 바로 죽지 아니하였느냐?“는 잘못된 질문을 하였지만, 타락한 인간들에게 곧바로 일반은총이 작용하였다는 것을 바르게 지적하는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소위 윤리 신학자들의 문제점
카이퍼는 프리드리히 쉴라이어마허(1768-1834)과 알브레흐트 리츌(1822-1889)과 그들의 입장을 따르는 윤리신학자들이 창세기 앞부분 (특히 창세기 1장-5장)의 형식과 내용을 나누어 내어 더 깊은 의미를 추구하게 하려던 것을 일부 의미 있게 생각하면서도, 이런 윤리신학자들이 시도하는 대로 하면 인간의 기원과 출현에 대해 확실성을 전혀 말할 수 없으니(1. 13. 7 [1:117]), “윤리신학자들의 개념에는 확실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1:117).고 하고, 또한 이들은 “모든 건전한 논리의 기본적 진리성을 파괴하고 있다”(1: 13. 7 [1:117])고 강하게 비판한다. 예를 들어서, 카이퍼는 윤리 신학자들이 말하는 창세기 앞부분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나왔으니 “이럴 수 있다”(this could)는 것과 우리가 믿고 말하는 “반드시 그렇게 되었다”는 확실성(the certainty that it had been so) “사이에는 과거로부터 직접적 설명을 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있다”고 지적한다(1:118). 대충 어떠하였을 것이라는 것(broad lines)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창조하셨고, 말씀하셨고, 규정하셨는지를 알 때, 그리고 우리 인류의 머리가 그 후에 어떻게 하였는지를 알 때, 그리고 그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심판이 임하였는지를 알 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졌고, 어떤 은혜가 부여되었는지를 알 때만 우리가 굳게 디딜 수 있는 굳건한 바닥과 작 조각한 조각물을 세울 수 있는 든든한 토대를 가지게 된다(CC, 1. 13. 7 [1:118]).
이렇게 말함으로써 카이퍼는 윤리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그럴듯한 설명에 근거해서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한다. 카이퍼는 윤리 신학자들이 제시한 것은 결국 “설익은(half-baked) 개념들”이라고 하면서, “이런 든든한 근거에서 믿음의 공동체는 그런 설익은 개념들 같이 가는 것을 항상 거부하였고 계속해서 거부할 것”이라고 단언한다(CC, 1. 13. 8 [1:118]).
진정한 출발점
그러므로 바른 출발점은 무엇인가? 카이퍼는 “우리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만일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고 계시해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CC, 1. 13. 8 [1:118]). 그러므로 사실들(facts)과 그 사실들에 대한 계시가 중요하다. 이를 윤리 신학자들이 말하는 “마음에서 형성되는 개념들”을 냉소적으로 언급하면서 카이퍼는 “사실들은 마음의 개념들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1:118). 그러면서 “여기서 기능하는 그런 사실들은 객관적인 영역에서 나타나며, 의사 전달이나 그런 의사 전달의 기록을 수단으로 해서만 객관적 역사에서 우리에게 올 수 있다”고 말하여,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계시하신 것과 그것을 기록한 것인 성경을 통해서만 사실이 명확히 전달된다고 한다. 이것은 창세기 앞부분의 말들을 문자적으로 취하고, 그 말들이 전하는 사실들에 의존하고, 그 말과 사실들로부터 추론하고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성경의 말을 그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논의할 때 그것이 그저 우리의 상상력을 위한 것이거나 그렇게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in reality)와 진리(in truth)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사로서의 낙원 이야기
진정한 신학에서나 그 일부로서 일반은총에 대해서 논의할 때 창세기 앞부분이 역사적 기사라고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이는 카이퍼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신학자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때도 성경의 앞부분이 역사적인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심지어 카이퍼 자신도 초기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학을 했던 사람으로서 참으로 신학적 회심을 하여 창세기의 앞부분이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는 역사적 기사(historical narrative)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카이퍼처럼 (창세기 앞부분의) “낙원 기사가 역사(history)일 때만, 오직 그럴 때만 우리들은 이 장들에 기록된 사건들로부터 결론을 끌어내고 (거기서) 우리들에게 보도된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사람이 말했으며 사탄이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CC, 1. 14. 1 [1:119]) 사람들만이 진정한 신학적 회심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퍼는 이렇게 “이 처음 장들에 있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실제로 발생했으며, 여기 보도된 것과 같은 말들이 실제로 말하여졌음을 전심으로 믿는 사람들만이”(1:119, 카이퍼 자신의 강조점) 소위 “낙원의 복음”에 적법하게 호소할 수 있고, 인간의 수고하는 것이 자신이 범한 죄 때문임을 바르게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이 장에 기록된 사실을 참으로 믿어야 그 의미도 참으로 믿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저 그 의미만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치레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카이퍼는 이 부분이 역사, 그것도 실재적 역사(real history)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1:120).
더구나 여기 기록된 것은 “문자적으로 모든 말, 참으로 하나하나의 모든 글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crucial)고 할 정도로 중요하고, 우리의 세계관을 통제한다”(1:120)는 점도 카이퍼는 강조한다. 물론 카이퍼는 이 부분만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그렇게 독특하고 귀하게 여긴다. 그가 성경의 축자영감(literary inspiration)을 참으로 믿음을 잘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카이퍼는 대충 이러이러한 것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니, 오늘날 어떤 사람들처럼 이런 식으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은 전혀 믿지 않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것의 문제를 카이퍼는 지적한다(1:121). 사람들이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음을 카이퍼는 지적하고 있다(1:123). 그리고 이는 교회에 큰 해을 가하는 것음을 지적하고 있다(1:126).
오늘의 상황에서는 카이퍼의 이런 입장을 잘 이해하고 견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카이퍼도 오늘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과거보다 더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CC, 1. 14. 2 [1:121]). 그러나 오늘날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카이퍼가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은 정확하게(accurately) 그리고 확실히(with certainty)”(1:120), 즉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믿어야 한다. 카이퍼는 이를 “우리들은 떠돌아다니는 생각들(floating notions)에서 벗어나 확신의 확실함(the firmness of conviction)에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1. 14. 3 [1:123]). 오늘날 떠돌아 다니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이나 유신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 말을 적용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창세기는 “기원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바른 정보를 주기 위해”(informing us about those origins) 주어진 것이라고 카이퍼는 강조한다(CC, 1. 14. 4 [1:124], 카이퍼 자신의 강조점).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창세기에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1:124). 그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본문이 말하면,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셨다는 사실과 그 말씀하신 내용을 모두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1:20).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계속해서 상당히 강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만드는 것이다.”(1:20)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추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1:120). 오늘날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히브리서 1:1-2을 인용하면서 1:120). 이제는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쳐졌고, 그렇기에 성경이 기록된 과거의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1:120). “계시의 빛이 없으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을 뿐이다”(1:1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로 걷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은 생명의 길에서 우리들의 발의 등이다”(시편 119:105을 인유하면서 CC, 1:120).
하나님은 영이시고 몸이 없으시니 실제로 말하셨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항해서 하나님께서는 입이 없어도 말씀하실 수 있으심과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특성으로 구약이 언급하고 있음을 카이퍼는 상당히 길게 논의한다(1. 14. 2 [1:121-23]). 당대에 자유주의자들의 논의가 널리 퍼져 가고 있었기에 카이퍼는 이점에 대해서 길게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 듯하다. 그가 말하는 “길을 잃은 신학”(a theology that has lost its way) 때문에 이런 상세한 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1. 14. 3 [1:123]). 믿는다고 말하나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1:123) 때문에 이런 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카이퍼는 종교개혁신학에 충실했던 화란교회가 1650년대 이후로 잘못되어 간 것이 성경을 철저히 믿지 않아 갔음에 기원하고 있음을 잘 지적한다(1:126).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의 성경의 중요성
이렇게 성경을 그대로 믿는 것, 특히 창세기를 그대로 믿는 것이 “안타깝게도 모호해져 버린”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에도 절실하다(CC, 1. 14. 5, 6 [1:125, 126]).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암중모색해서 찾으려는 인생관과 세계관들은 항상 변한다(1:125). 그러다 사람들은 결국 “확실성이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그러므로 무지에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며 주저앉는다(1:125).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이것이 현시대를 묘사하는 매우 적절한 말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쓸데없는 추구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큰 특권을 부여받았다”(1:125). 이렇게 바른 토대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회의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계시 안에 안식할 수 있다. 철학자는 바른 철학을 찾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바른 철학, 실재관, 그의 바른 입지를 이미 가지고 있고, 그 입지에서 끌어낸 ‘그의 배후와 주변과 앞에 있는 것들에 대한 잘못되지 않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1:125). 이렇게 성경은 모든 것에 대한 출발점이 된다.
성경에 근거해서 일반은총에 대해서 정확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활력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리라 카이퍼의 말을(:126-27) 주의 깊게 들으면서 계속해서 이 논의를 하며, 일반은총에 근거한 활동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와 세상의 분명한 관계를 말할 수 있게 된다(Cf. CC,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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