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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에 대한 이해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 2025. 4. 12. 13:23

    <월드뷰> 295 (2025년 1월호): 118-21에 실린 글을 여기에도 올려서 더 많은 분들이 보도록 하니 부디 많은 분들이 보시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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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13)

     

                                                                       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에 대한 이해

     

    창세기 기록 중에서 몇 가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신학적 성향이 명확히 드러난다. 19세기 이후에는 이 생명나무가 에덴 동산에 실재했다고 보느냐의 여부가 신학적 차이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학생 시절과 초기 목사일 때의 자유주의적 카이퍼와는 달리 원숙한 카이퍼는 이 나무가 에덴 동산에 실재했다고 보았다. 그는 에덴의 여러 나무 중에서 두 나무가 중요했다는 것을 정당하게 강조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둘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한다(CG, 1. 17. 2=1:149).

     

    이렇게 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의 실재를 인정하고 이를 신비로운 나무로 보는 것은(CG, 1. 17. 6-=1:153) 좋은데, 문제는 이 나무의 의미에 대한 논의이다. 카이퍼는 첫 부분에서 왜 이 나무가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성례전적인 나무가 아닌지를 상당히 길게 논의하고 있다(CG, 1. 17, 1=1:146-48). 이는 성례전적이라는 말을 오늘날 우리가 은혜 언약의 성례로 이해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타락한 아담은 믿음을 상실했으니 그 믿음이 강화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신앙은 우리의 믿음과 달리 일반적인 신 신앙(general faith in God)이었으므로(CG, 1:147) 그 상태의 신앙도 강화될 필요가 없었다고 논의한다(1:148). 카이퍼는 타락 이전에 신앙의 강화를 말하는 것은 적절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고 강하게 말한다(1:148). 이렇게 생명나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성례전적인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옳다. 그러나 생명나무가 넓은 의미의 성례전적인것이라고 카이퍼가 말한다. 예를 들어서, 노아 언약에서 무지개가 언약의 표로 사용된 것과 같은 업ㄹ은 의미에서의 성례전적인 나무라는 것은 인정한다(1. 17. 6=1:154). 카이퍼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다.

     

              생명나무에 대한 카이퍼의 매우 문자적 이해

     

    그렇다면 생명나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알려져 있고 확실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하면서 카이퍼는 창세기 2:93:22을 확실한 요소들이라고 말한다(CG, 1. 17. 2=1:148). 에덴 동산의 모든 나무들이 모두 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나무들이었는데, 그중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2:9)고 카이퍼는 성경을 따라 말한다.

     

    생명나무는 우리의 존재와 관련된 나무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의 의식(意識, consciousness)과 관련된 나무라고 카이퍼는 해석한다(CC, 1:149, 153). 카이퍼의 이런 추론은 좀 지나치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는 이 생명 나무는 (우리의) 자연적인 삶과 좀 더 관련 되는데 비해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좀 더 우리의 영적 존재와 관련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CG, 1:149)고까지 지나치게 말하여 오해를 유발한다.

     

    이와 연관해서 카이퍼는 그가 자연적인 몸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는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먹으라는 명령이 주어졌지만, 그가 영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하는 명령이 주어졌다는 자신의 주장을 두 번 이상 하고 있다(1:154). 카이퍼는 타락 이전에 사람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이다. 이런 이해로부터 카이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도덕적 지식을 얻고 영적으로 성숙하려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해야 하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질서를 전적으로 반전시키는것이라고 해석한다(CG, 1. 17. 6=1:154). 영적으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좋은데, 이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지나치게 연관시키는 것은 문제다.

     

    물론 그는 여기서 자신이 말하는 자연적인 삶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오늘날은 이 용어가 초자연적인 능력과 대조하여 사용되지만, 여기서 자신이 사용하는 자연적인이라는 말은 그런 대조에 대한 의식이 없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1:149). 그러나 이와 같이 복잡한 설명을 해야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의 도덕적 지식에서 형성되는(arises from) 영적 의식”(1:149)과 관련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더한 오해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강조점은 덧붙인 것이다). 카이퍼의 뛰어진 능력이 세세한 것을 잘 생각하지 않고 말하게 하는 결과를 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런 곳이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타락하기 전의 원상태의 아담은 영적 의식이 없거나 잠재적으로만 있는 듯이 생각하도록 오해하게 할 수 있기에 결국 카이퍼의 의도에 잘 부합하지 않은 것이 된다. 결국 카이퍼는 생명나무는 우리의 몸과 연관되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의 영혼과 연관된다고 (전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단순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1:149)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그 자신이 인정한 대로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하다가 정확한 것이 못 되게 표현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카이퍼는 타락한 상태에서 사람이 이 생명나무(this elixir of life)를 먹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한 매우 문자적이고 무리한 추리까지를 한다. 그때는 죄를 섬기는 자연적인 생명이 굉장한 힘을 가지게 되어 죽지 않는 데(fortify himself against death)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창세기 3:22이 뜻하는 바라고 해석한다(CG, 1. 17. 6, 1:153). 그래서 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그룹이 내려와서 에덴 동산을 지켜야만 했다고 한다(1:153). 타락한 상태에서 이 나무의 열매를 먹어 몸이 강화도고 죽지 않게 되는 것은 생명나무에 대한 신성 모독적인 오용”(a sacrilegious abuse of the tree of life)라고 한다(1:153).

     

    이처럼 카이퍼는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먹으려고 하는 것은 이 나무로부터 물리적 생명을 증진시켜 보려고 한 것이라고 한다(1:150). 물론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먹도록 의도하셨음을 잘 말하는 것(CG, 1. 17. 4=1:151)은 옳다. 그러나 그로부터 생명나무를 인간의 물리적 조건에서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는 것(1:151, 152), 더구나 이를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현존하는 여러 나무 들 가운데서 치료 목적의 나무들을 언급하는 것(CG, 1. 17 5=1:151, 152)은 카이퍼의 표현 방식을 가지고 반어적으로 말하지면,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여 질문한(venture to ask)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덴 동산의 다른 모든 나무의 열매가 사람의 물리적 생명이 창조된 상태로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데, 그로부터 생명나무의 목적이 물리적 몸을 영광의 상태로 옮기는 것이었다(1:151)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이런 이해를 따라서 카이퍼는 생명나무로부터는 자유롭게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고 주장한다(1:154).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 금해진 것은 인간이 타락한 후라는 것이다.

     

              생명나무에 대한 바른 이해

     

    그러므로 생명나무와 과련된 문제에 있어서 카이퍼가 비판한 견해가 오히려 더 정확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 카이퍼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창세기 3:22은 타락한 사람이 생명나무를 먹으면 물리적으로 그 존재를 계속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과 여러 학자들이 제대로 설명한 바와 같이 타락한 인간 상황을 반어적(ironical)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탄의 사사에 따라서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시도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하는 반어적 표현인 창세기 3:22은 결국 타락한 사람은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말이다. 이점에 있어서 게할더스 보스와 에드워드 영의 이해가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스(Vos)는 이렇게 말한다: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그 나무 실과를 따먹으려는 경향이 있을 말씀하셨다.... 타락 이후에 그 열매를 얻어 보려는 노력은 자격을 잃은 자가 그 열매를 훔치려는 무모한 시도인 것이다.”(Vos, Biblical Theology, 28-29=이승구 역, 성경신학[서울: CLC, 2000], 44). 더 명확한 설명을 영(Young)이 제공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들은 이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자격이 없으므로 에덴 동산에서 축출당한다는 것이다.

     

    생명 나무는 금지된 기간 동안에 먹지 않는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된 더 높고, 불변하는 영원한 생명과 연관된것으로, 사람이 선에로 확정되기 이전에는 이 생명나무로부터 열매를 따먹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좋은 해석이다. (이런 해석의 좋은 예로, Vos, Biblical Theology, 28을 보라). 보스는 생명 나무가 성례전적인 나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높은 상태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 나무의 열매를 성례전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주어진다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Vos, Biblical Theology, 28: “the tree would appropriately have been the sacramental means for communicating the higher life.”).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카이퍼가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 것, 생명 나무의 의미를 생각하려고 한 것은 좋은 것이다. 또한 이 나무가 넓은 의미의 성례전적인 나무라고 인정한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상력 발휘로 이전의 바른 해석을 비판하고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제시하면서 아주 이상한 해석을 시도한 것은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항상 성경 해석을 주의해서 하려고 하고, 잘 모를 때에는 이전의 바른 해석을 따라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칼빈과 게할더스 보스의 논의가 생명 나무에 대한 훨씬 균형 잡히고 바른 견해라고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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