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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유한 자는?
    교회와 설교 2010. 5. 15. 11:02

    2009년 11월 18일에 강변 교회 새벽기도회에서 했던 강설입니다. 역시 그 자리에서 풀어 쳐준 강도사님께 감사드리면서 이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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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 말씀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온유한 자라는 말은 우리가 많이 듣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유가 무엇인지도 성경을 통해서만 배우고, 성경을 통해 교정받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하면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민 12:3).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 역할을 하던 한 인물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인물됨에 우리의 마음이 갈 수 있습니다. 또 신약 성경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지칭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특징 중에 이러한 온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온유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선 온유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온유한 자라고 하면 우리는 자신이 온유한 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하기 쉽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대로 너희는 '~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서술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명령법이 항상 따라 나옵니다. 그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이냐면 서술법이 먼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 나는 충분히 온유하다고 스스로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성경이 처음부터 너희는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너희는 '~이다'라고 하면 우리는 일단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직분 받으시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장로 되기에 참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우들이 선출하고, 임직하는 그 날 공식적인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으로 주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사람을 통해서 하시지만 이 직임은 나를 뽑아준 성도들이 주는 것도 아니고 목사님이 주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이 겸손하다고 합니다. 또 온유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일단 뭔지는 몰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다 알고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치고 아무도 다 알고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비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도리가 믿으려 해도 도저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를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믿고 나아갔더니 이해가 점점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믿고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믿고 나아간 후에 덮어놓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나서 일단 믿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나아가기를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무엇인지를 더욱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온유하다고 하실 때에도 우리는 일단 그렇다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출발점은 덮어 놓고 믿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출발 후에는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묻는다고 뭐라고 하시지 않고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이 온유하다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온유함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의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온유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라우스'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영어의 proud와 전혀 다릅니다. 그 의미는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뭔가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죄성이 우리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뭔가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자기가 안 되면 자기 자녀들이 이룰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온유는 이와는 전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이는 내가 내 여건하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 여건이 전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연약해도 온유할 수 있고 또 세상 사람들이 굉장히 존경하고 부러워할 만한 상황에서도 온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외적 여건이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외적 여건이 우리로 하여금 온유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마치 심령이 가난한 자와 같다. 아무것도 의지할 수 있으면 사실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있기 쉬운데 그럼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또 너무 부유하고 의지할 것이 많아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힘들 것 같은데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이 세상에서 연약하다. 그래서 남들이 해를 가할 때에 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면 온유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시편 37편과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평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다 되는데 나는 다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음속에 불평이 드러납니다. 주님에서는 이 상황에서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불평하지 말라고 하며 이렇게 되면 행악에 치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이것이 전형적으로 온유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온유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화를 내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능력이 많습니다. 자제력도 많고 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일을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대한다고 해봅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이 훨씬 낫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잘 참아냅니다. 그러면 겉으로는 이 사람은 온유한 사람처럼 보여집니다. 저사람이 악하게 대할 때에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속으로 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다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는 온유해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온유하지 않은 케이스들이 더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당하면서 속으로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화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지요.

    그렇다면 온유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훨씬 더 능력이 많아서 내가 보복할 수 있음에도 전혀 보복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더 받아주는 태도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이 구절이 노예의지와 같다고 말하면서 말도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하면 세상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능력이 많은데 보복하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우습게 여기는 이러한 태도는 전혀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속으로도 그 사람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이 온유한 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오용하면 안 됩니다.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갚아 줄 거야! 기다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믿으면 굉장히 악독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속으로 "너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심령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니다. 이것은 차마 하나님 앞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것이라는 것은 진짜 하나님 앞에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사실 불쌍히 여기는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진짜 온유한 사람은 이 사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누군가가 나를 계속해서 괴롭힌다고 해봅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나중에 심판하실 때는 내가 아니라 괴롭히는 상대방을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경적으로 누구를 저주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막 저주를 한다고 해 봅시니다. 그러면 대개는 막 화가 납니다. 그래서 나도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 끝까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면 상대방이 저주를 해도 내게 그 저주가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참고 참다가 나중에 폭발하면 우리도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끝까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전혀 속으로 부글부글 끄는 것 없이 그냥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는 잘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이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온유하신 분에게 인간들이 행한 최대한의 악행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희 왜 그러니? 내가 누군지 아니?"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화를 내는 상대방이 불쌍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향한 저주가 사실 그 자신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여기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마음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할 때에 성령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이렇게 하려고 하셨다는 생각으로 해야 합니다. 매 순간 우리는 성령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을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매순간 우리는 그렇게 고백해야합니다. 성령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이것이 실제가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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