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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평케 하는 자는
    교회와 설교 2010. 6. 9. 07:58

    2009년 11월 20일에 강변교회(허태성 목사)에서 제가 강설했던 내용을  강변 교회 이동렬 강도사님께서 그대로 치신 것을 여기 소개합니다. 읽으시는 분들 모두에게도 그 자리에 참석하셨던 분들에게와 같이 유익이 있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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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마태복음 5:38-48, 5:9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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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이 새벽에 나오시는 모습 보면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주의 공동체는 참 독특한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에게 돈을 주고 나오라면 이렇게 새벽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공동체는 참 독특합니다. 자기 돈을 갖다 내면서 이렇게 열심히 나옵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사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나의 전부를 드린다는 생각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우리가 함께 이렇게 모인다는 점입니다. 혼자 한다면 너무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은혜를 받고 서로 격려를 받으면서 이렇게 열심을 냅니다.  이러한 면에서 아브라함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혼자서 신앙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혼자 신앙생활을 했다면 사실 지금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오늘과 같은 말씀을 보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절망감을 얻게 된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PEACE MAKER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더 받은 사람은 이것이 과연 가능한지 고민합니다. 이 이야기는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신앙이 없는 사람이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정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섣부르게 우리가 은혜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각과 태도는 정말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원래 남아공에서 만든 위원회입니다.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정책을 하다가 이 정책에 의해서 수많은 흑인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나중에 흑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는데 그러고 난 다음에 설치한 위원회가 <진실과 화해의 위원회>입니다. 이 위원회는 당신들이 잘못한 것을 사실을 인정하고 진실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그러면 화해하겠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기독교적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한 것만큼 배상을 하거나 죄 값을 치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18.2%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그리고 그중에 과연 정말 믿는 사람이 얼마인지는 사실 미지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진실만 드러내면 화해를 이룬다고 합니다. 우리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남아공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남아공에서는 신학자와 이야기를 해도. 백인들은 속으로 흑인 정권이 잘 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도 도저히 화해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화해를 우리가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화해 화평 평화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절실한 각성에서 시작합니다. 섣부르게 우리가 하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진짜 사태를 파악하고 나면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관계를 화해라고 하는데 이 관계 뿐 아니라 온 세계의 피조계에 미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실현되는 것을 화평 또는 평화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화평 평화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특히 미스코리아를 뽀든지, 미스 유니버스를 뽑는 대회를 할때 그렇다. 그런데 진짜로 이들이 이를 위해 사는 것입니까? 그냥 정치적으로 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안 하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이 세상이 평화를 말하지만 결국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화평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절실한 인식이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면 기독교는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우선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다는 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주님께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로 우리들 사이의 담을 허시고 전에 멀리 있던 너희를 가깝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선물입니다. 당신님께서 화평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안 되던 화평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화평을 이루려고 애써도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목임을 절실히 느끼게 될 때에 바로 복음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식상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이 우리의 희망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이것만이 온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이러한 확신이 옵니까? 절대로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을 때입니다. 우리에게 큰 고통이 왔다고 해봅시다. 골치가 아프고 머리가 아플 때에 두통 치통 생리통에 게보린이나 펜잘이나 이러한 약을 찾습니다. 아프면 자기가 다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들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의사들의 고민이 환자들이 의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 민간요법에 밝아서 말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머리가 아파서 약을 먹으면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펜잘을 먹는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다 진통제라고 합니다. 진통제는 진짜 그 아픈 것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증상만 잠시 없애주는 것입니다(pain-killer). 증상만 없애주는 것인데 이를 과용하면 이것이 오히려 우리를 아프게 만듭니다. 아편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해결책,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화해와 평화는 이러한 진통제와 같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이러한 확신 없이는 안 됩니다.


    왜 믿느냐고 물으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지만 그러나 다른 이유에서는 우리는 미스코리아처럼 말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만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전도 방법이 이렇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좋으니까 믿으라가 아니라, 예수 안 믿으면 너도 그렇고 이 세상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들은 진통제적인 효과가 있을 뿐입니다. 잠시 만족을 주겠지만 사실 전혀 만족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느낄 때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는 안 된다는 데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화목과 화평을 이루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평강의 왕입니다(prince of peace). rmrk 평강의 구주이십니다. 정말 그분만이 이 세상 가운데 평강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분이 아니면 이 세상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만 믿어서는 안 되고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져다주는 사람에서 시작합니다. 이 의식을 가장 깊이 가진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고후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화목은 1차적으로 우리를 위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는 하나님과 화목한 것이 먼저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부 다 드리니 하나님과 화목하려 한다고 됩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1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건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우리가 이제야 비로소 주관적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2차적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1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고 2차적으로 내가 주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예수 믿기 전에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고 믿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화목을 이미 십자가에서 2000년 전에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집 떠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를 드디어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믿기 전에도 죄인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기다리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화목하게 하시고 나를 기다리신 주님을 생각할 때에 그 다음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됩니까? 고후 5:18에 1차적으로 주께서 나를 화목하게 하셨고 그리고 난 다음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임직을 합니다. 몇몇 사람들을 직분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는 교회적인 일이고 모든 교인들이 다 참여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성도가 행해야 하는 교회적인 일입니다. 다른 교회 성도들은 올 필요가 없습니다. 대게 우리는 이 일을 잔치화해서 다 오게 합니다. 점점 이렇게 하는데 사실 다른 교회 성도들은 안 와도 되지만 강변교회 성도들은 다 와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서약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직분입니다. 이는 교회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교회에서 특별 직임을 맡은 사람들 외에 모든 성도들은 다 보편적인 직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다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입니다. 이를 보편적인 직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왕이고 선지자고 제사장입니다. 사실 이 말씀을 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추구하기 위해 싸웠던 때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신약 시대 1세기에 베드로도 했던 말입니다. 종교개혁 때에 처음으로 생긴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학교를 선지 동산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는 정말 잘못된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지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언자입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있는 사람에게 선지 동산 선지 학교에 다닌다는 용어를 쓰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왕 캠페인 하는 김에 하나 더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없애야 할 용어 가운데 또 하나가 천주교에는 쓰는 말인데 개신교에서 쓰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지 순례입니다. 천주교에는 성지가 있습니다. 지정해 놓은 곳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거룩한 곳이 있습니다. 성전도 그렇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사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가는 곳마다 한 곳도 거룩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실한 천주교도와 엉터리 개신교도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신실한 천주교도는 이 세상에 거룩한 곳과 신성한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원론적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방식과 예배당의 방식이 따로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도 신실한 천주교도는 거룩한 곳에서는 잘 있습니다. 그러나 엉터리 개신교도는 다 똑같다고 여기며 그래서 소위 거룩한 곳에서도 엉터리로 합니다. 그러면 참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러면 차라리 신실한 천주교도가 더 낫다. 우리는 엉터리로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당히 많은 개신교도들이 천주교에서 하는 방식을 동경합니다. 그래도 성당이 엄숙하다고 여기며 거룩하다고 여기며 좋아합니다. 우리가 일부러 없애고 새롭게 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엉터리 개신교도는 하향 평균화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못하고 삽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예전에는 목사님들 장로님들을 굉장히 고귀한 성직이라 여기고 그리고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하향평균화 되면 안 됩니다. 장로가 되기 전에나 후나 똑같다든지 아니면 더 못되게 된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성경적인 것은 모든 곳에 거룩한 곳입니다. 이 의식을 가장 잘 설명했던 사람들이 바로 청교도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가게에서도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배당 뿐 아니라 가게도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화평을 가지고 가서 가는 곳마다 거룩해야 합니다. 새벽에 우리는 예배당에 와서 거룩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를 끝내고 그리고 이제 세상에 가서도 거룩한 곳에 가서 거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우리가 어디를 가거나 거룩한 일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지가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순례가 따로 없습니다. 예수 믿고 사는 일 자체가 바로 순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캠페인을 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돈이 조금 있으면 예루살렘 같은 곳에 갖다 와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더라도 성지 순례라고 해서는 안됩니라. 그냥 성경 지리 문화 연수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곳에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직임 가운데 주신 것이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직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임직을 받지 않더라도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다 받았다. 이제 우리들은 20절에 보십니다.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께서 화목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이 세상에 평화가 오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도하지 않겠지만 마음속에 이렇게 전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을 저 사람에게 못쓸 거 하는 거라고 여깁니다. 예수 믿어 보니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을 예수 믿게 해서 힘들게 할 게 뭐냐고 여깁니다. 이렇게 하면 전도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예수 믿지 않으면 이 세상에 평화가 없고 뿐만 아니라 예수 믿지 않으면 저 사람 자신이 문제 속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맨 날 사람들에게 위협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인데 위협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최후의 방책으로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맨 날 화평케 하는 자가 사람들을 위협하면 안 됩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정말 위험한 상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수단을 써서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1차적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위협할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그 확신을 갖고 그 사람에게 정말 잘해주는 일이라고 여기고 그 사람을 위해 최고의 일을 해준다는 생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직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직분을 받는 사람도 물론이고 다른 우리 모두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있습니다. 이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직분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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