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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해야 하는 애통은 무엇인가?
    교회와 설교 2010. 5. 9. 19:40

    2009년 11월 17일 강변 교회 새벽기도회 강설 내용

     

    본문:  마 5:1-6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애통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제 심령의 가난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네 번째 복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주리고 목마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냥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프고 주린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태가 이야기하는 심령의 가난함이 옳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심령을 가져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뭔가를 갈망하는 것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향한 갈망이 있고 이를 위해 전력투구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전력투구하며 살아가고 잇습니까? 나의 삶의 원동력을 위해서 말 하는 것입니다. 왜 사십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목적이 없고 그냥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러분은 무엇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산상수훈에서는 의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일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전력투구해야 하는 갈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의 방향으로 애를 써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삶뿐 만 아니라 우리의 민족과 삶과 사회 가운데에 드러나도록 하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이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고 온 세상이 그리고 이 사회가 의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온 세상에 사람이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날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애를 써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왜 사냐고 묻거든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기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이 온 세상에 가득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우리가 첫째로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애통하는 일입니다. 왜 애통합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려운 일이 많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정말 슬픈 일이 있기 때문입니까? 물론 이러한 것들이 애통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슬픔은 안타까움에 슬픔이 복받쳐서 우는 울음입니다. 정말 이 상황에서 어찌할 수 없어서 나오는 울음입니다.

     

    여기에서 애통을 생각할 때에 두 장면이 생각납니다. 하나는 바로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하는 예레미야의 애통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에 예레미야 애가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나옵니다. 애가 1:2에 보면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른다. 사랑하는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여기에서 보면 자신의 어려움에 우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렇게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1:16에 보면 계속 예레미야가 기도를 하는데 자신의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려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 해서 하나님께서 이를 심판하는 상황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손을 폈으나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때가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언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제 심판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대개 선지자는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아무리 회개하도 소용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침략하는 나라에게 항복하라고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하니 선포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한없는 눈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2:11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 눈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않아서 어찌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는 울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웃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웃어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울음이나 애통은 복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속에서 진정한 애끓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는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일이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별로 반가운 메시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동안 우리가 울었으나 주께서 금방 우리의 울음을 그치게 하신다는 메시지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절대로 이 세상에 애통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때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바라보는 날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바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사야 65-66장에서 앞으로 내가 온 세상을 새롭게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리라고 하시더니,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세상에 왔음을 말합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변하여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 진다고 합니다.

     

    꼭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이 개혁신학이 바라보는 바입니다. 우리 형제가 루터파인데 루터파와 우리는 꼭 같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 분들이 루터파의 예배에 참여를 해보면 매우 이상할 것입니다. 천주교회 비슷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하다가 중간에서 그만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루터파 교회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우리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가 틀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생각에서도 서로 틀립니다. 루터파는 기존의 모든 세상이 사라지고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혁파 신학에서는 사람들이 잘못함으로 말아 먹은 이 세상을 예수님께서 완전히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생시키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중생된 사람들이 나중에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점점 변해나갑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주께서 마찬가지로 또 새롭게 하실 때가 있는데 바로 이 때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 지는 때입니다.

     

    여기 유비 관계가 형성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실 때에 우리를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을 바꾸셔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실 때도 기존의 세상인데 그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옛 것은 기존의 것이 변했기 때문에 없어질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장막을 우리 가운데 치시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몸이 있지 않기 때문에 장막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장막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께서도 텐트 속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텐트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막이 있고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만들라고 하신 성막이 있습니다. 이 성막의 아주 좋은 점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있는 곳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가는 곳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이름을 두시고 가는 곳곳마다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막은 움직입니다. 성막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영광의 구름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구름이 떠오르게 되면 레위 사람들이 다 성막을 걷습니는다. 그리고 구름이 움직이면 같이 가고, 이 구름이 서면 자기들도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상징을 옛날에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상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계시지만 하지만 이것의 실상이 있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실상은 그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막이 말해주던 모든 것이 실체였습니다. 성막은 그림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성막이 가까이 가면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장막을 우리 가운데 치실 거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정말 종국적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의 애통하는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 눈물은 어떤 눈물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났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사업이 안 되어서, 자녀들이 수능에서 점수를 낮게 맞아서 눔물 흘리는 것입니까? 이는 다 자기를 위한 눈물입니다. 그래서 신세타령을 하려고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입니다. 이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것입니까? 하지만 사실 주님께서 씻어주시는 것은 이러한 눈물이라기보다는 아까 보았던 그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고자 하는데 이 세상에서 되지 않는 그것으로 인한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흘렸던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 때문에 운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살펴보니까 이러한 눈물이 사실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안타깝고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위로는 궁극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위로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진짜를 버려두고 가짜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위로는 종국적으로 그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애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사에 죄로 말미암아 이러한 애통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게 된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려고 마음 먹으셨으니 우리는 역사의 비밀을 안 사람이고 진정 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이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날에만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역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이는 그저 울고 났을 때에 통쾌해지는 그러한 일과는 다릅니다. 이를 가리켜 카타르시스라고 하는데 이는 진정한 주님의 위로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위로하시는데 이는 카다르시스를 느끼는 것보다 훨씬 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종교적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좋은 분들이 대개 오늘은 예배를 드린 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예배의 중심이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배를 통해 만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물론 우리는 정말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면 내 심령 가운데 은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 받고 위로 받기 위해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종교적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한다면 내 마음 속에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애통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총신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에 구역 예배를 인도하는데 우리 구역에 70세 된 어떤 남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은혜에 대해서 대답을 하시는데  "은혜는 눈물과 콧물이 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 말씀이 세월이 지날 수록 참 진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사람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과 북한 사람들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참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애끓는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워야 할텐데 하는 애끓는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이 애통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애통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주님께서 참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원하시는 이 마음을 알기에 우리 마음 가운데 이 애통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강한 위로함을 날마다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위로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 자신과 이 국가와 나라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애통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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