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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령이 가난한자는?
    교회와 설교 2010. 5. 1. 22:11

    2009년 11월 16일에 강번교회(허태성 목사님 시무)의 새벽기도회 시간에에 강설했던 내용을 이동렬 강도사님께서 새벽기도회 시간에 그대로 치신 것이 강변교회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기에 여기 다시 소개합니다. 귀한 기회를 주신 강변 교회와 이런 작업을 해 주신 이동렬 강도사님께 감사드리면서 그 유익을 더 많은 분들이 나눌 수 있도록 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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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선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 번째는 이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 사건이 벌써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이 본문이 기록되는 그 시점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시점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시점은 십자가 사건이 뒤에 있는 시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가 있기 이전에 있었던 사건임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 사건이 십자가가 있은 후의 시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십자가의 은혜가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할 때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러저러한 사람이 있다고 하고 있다. 첫째는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지금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라고 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다고 하신다. 만약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라고 하셨다면 우리 모두는 안타깝지만 아무도 하나님 나라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저러한 사람이 있다고 하고 있다. 주님께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장차 있으실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이 앞으로 있을 일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만약 우리가 무엇을 이루라고 하셨다면 그렇다면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시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문이 이야기하는 대로 하루에 하나씩만 하려고 애를 쓴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오늘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려고 애를 쓴다고 해보자. 또 마음이 애통하는 사람이 된다고 애를 쓴다고 해보자.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원하는 수준을 이룰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노력을 해서 이를 해보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교회 역사 가운데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노력을 늘 해왔다. 스스로 해보려고 하는 노력을 해봤다. 애를 썼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알아보면 어떤 의미에서 진자운동을 하는데 제대로 된 때에 진자운동은 우리가 노력해봐야 절대로 안 된다고 깨달을 때가 제대로 된 때이다. 이는 애를 쓰고 노력해본 사람이 이리로 간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한 번 해보겠다는 쪽으로 간다. 노력을 해보는데 해본 다음에 발견하는 것은 암만 애써봐야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가 기독교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안 된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노력을 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기쁨에 도취되어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주님께서 다 하셨으니 이제 내게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 여기고 편하게만 산다. 주님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하셨으니 주님께 내 맘을 드리기만 하면 모든 좋은 것을 주시리라 여긴다. 사람들의 마음이 이리로 가기 수운데 이렇게 되면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형태는 갖출 수 있다. 주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하는데 그러나 인간들이 계속해서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노력하려고 할 것이다. 그때에 또 하나님께서는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이 다시 돌아가게 한다. 어디로 돌아가게 하는가? 바로 은혜로 돌아가게 한다. 주님의 의를 생각할 때에 도무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노력이 부족해서 노력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루터의 마음이 깨어진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자칫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이 이제 노력을 할 거라고 하기 쉽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주님의 일을 하기 시작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루는 일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나온다. 유대인들은 항상 앉아서 가르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신 것이다. 우리는 목사님께서 가르치시면 앞에 나아와 서신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항상 가르치면 앉는다. 이 배경이 이렇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가르치시며 앉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시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반대말은 심령이 부유한 것이다. 심령이 부유한 사람은 내가 무엇인가 의존할 것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존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녀라든지 돈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세속적으로 사람들이 의존하는 것들이다. 만약에 우리 마음에도 이러한 것들을 의존하고 있으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닌 것이다. 물론 켕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보다 더 의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하는 일에 의존한다. 이는 아까 세속적인 의존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는 자녀나 물질이지만 우리는 기독교에서 이러한 것을 의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왔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는 것을 의존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새벽에 나아와 기도하니까 내 사업이 잘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영적인 파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 사실 의아스러운 말씀이 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정말 심각하게 우리의 상태를 고민하게 하는 기본적인 말씀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는 날마다 우리가 새벽기도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 이 세상 것이 아니더라도 아직도 우리 안에는 이를 향한 연연해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저러하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안위하게 하실 거라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영적인 일을 쌓음으로 우리의 토대를 강건하게 하려는 우리의 요새를 구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동원해서 큰 요새를 만들고 든든한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도 이렇게 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누구 앞에 드러내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 한국 교회는 이렇게 시작했다. 주님 앞에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지나 이제 조금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늘었다. 18.2%라고 한다. 그런데 이 통계에는 사실 어쩌다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움직임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무리였을 때는 하나님 외에는 의존할 곳이 없었다. 절실하게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결코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숫자에 의지하고 규모에 의지하고는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절대로 없애버려야 한다. 내가 주님께 진정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려야 한다. 이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반드시 나의 영적인 파산 상태를 알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 처음으로 나갈 때뿐만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산다는 의미가 없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이 마음이 예수 믿고 사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고백해야 한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이 말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령의 은혜로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노력해야 하는 것 자체를 없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에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로 내가 노력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대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렇게 산다. 날마다 매일 저녁마다 운다.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굉장히 경건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하룻동안 산 것을 생각했을 때에 자신이 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울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성찬에 참여한 이후로 내가 나를 향한 삶을 봤을 때에 내가 주님을 향해 노력하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삶을 성경의 절대적인 말씀의 빛에 비추어 볼 때에 이것이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는 내가 한 것으로 주님 앞에 설 수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노력해 나아가는 것이 있어서 이것 정도면 된다고 여기면 안 된다. 우리가 행한 것은 다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날마다 주님 앞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날마다 나의 영적인 파산상태를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애통함이 나오는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안 된다는 것이 인정되기 때문에 애통함이 나와야 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주님 앞에 애를 써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새벽기도 때는 이렇다. 그러면 노력하는 바가 있는데 이렇게 노력해서 하는 것이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 노력한 바로 주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이만하면 인정할 만하다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상태로 우리가 나아가야 한다. 나의 의로운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나의 영적인 파산상태를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표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나는 안 된다고 하며 주님 앞에 나는 안 된다는 그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이렇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잘했다고 하고 주님 앞에 오게 되면 그렇다면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문제점이 있다. 사람들은 늘 이것 때문에 주님 앞에 야단을 맞았다. 자기가 다 행했다고 하며 주님 앞에 칭찬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의롭다한 사람은 성전 저 뒤편에서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말하는 이 세리와 죄인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훨씬 많이 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들은 했기 때문에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없었다. 잘했는데도 이를 잘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다. 실질적으로 물질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기댈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나는 큰일 난 것이다. 그러나 만약 통장이 많이 있으면 어쩐지 든든하다. 그러나 가난하면 하나님만 의지하기가 더 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체가 우리를 영적인 가난 상태에 세우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정말 벌거벗은 상태로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는 것은 영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했는 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주님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외쳐야 한다.


    기독교 귀족 가문이 있다. 몇 대째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칫하면 이것을 의지하게 된다. 이것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자산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낮아지지 않은 마음으로 출발 할 수 있다. 강변교회 교인이라는 것이 사실 영적인 자산이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영적인 가난함이 아닌데서 출발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아침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영적인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하신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있다고 하시는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 마음이 항상 어떠한 것도 의존하지 않고 늘 하나님만 의존하는 마음이 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애쓴 어떠한 것이 주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된다. 오직 우리는 십자가로만 기쁨을 누리며 주님 앞에 낮아진 마음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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