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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反) 기독교적인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삶
    우리사회와 기독교 2008. 7. 23. 01:12
     

      반(反) 기독교적인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삶


    19세기 말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천국 복음을 받아들여 세워진 한국 교회가 21세기에 들어서 아주 강한 반 기독교적인 사회 속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어떤 면에서 이는 우리들이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책임을 지려고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상황은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면 오히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참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은 우리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더한 문제 가운데에로 들어 갈 수도 있고,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도 있다. 중세 말기의 상황과 같은 상황 속에 있다. 계속해서 기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진정으로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교회가 될 것이냐,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에로 회복해 가는 교회가 될 것이야?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그 동안 그리스도인과 교회이려고 노력했었으나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비판하는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 모두 함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하나님의 뜻의 객관적 원리와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주체적 원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를 이 세상에 없어지게 하는 주범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빚어 만드시는 사람다움을 드러내는 일을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세상은 우리를 향해 너희가 하는 일이 과연 무엇이냐를 묻게 된다. 물론 그 동안에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참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보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 것을 보여 주기에 이 세상은 우리 모두에게 문제를 제기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열심히 모이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모여서 종교적 예배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그렇게 모일 수 있는 커다란 예배당을 세우고서 그 위용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린, 아니면 그것을 너무 나도 적게 보여 주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다.이 상황 앞에서 변명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못되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사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항상 해 오던 것이다. 회개는 처음 믿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우리가 잘못하였음을 고백하고 그 잘못된 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따라야 하는 삶의 규범이라는 것을 버려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경적 기준에 따라서 비판하고 그것을 변혁시켜 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성경 비평이 상당히 일반화 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겨진다. 사람들이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지 않아도 된다는 사상이 온 세상에 넘쳐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되면 이 세상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지고, 결국 겉으로는 기독교적이지만 속으로는 기독교적인 것이 전혀 없는 배교적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안 되어 참된 기독교의 모습을 이 세상에 보여 주는 일에서 실패하면 사람들은 기독교인 되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하든지, 아니면 잘못된 기독교적 주장을 진정한 기독교의 주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잘못된 길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처음 있게 되었던 상황(1세기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이나 기독교가 한국 땅에 처음 있게 되었던 상황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도 반기독교적 사회 속에서 살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야 말로 소수였다. 그런데 반기독교적 사회 속에서 작은 무리의 양떼와 같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훌륭하게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내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직접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어 그 핍박받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고 든든한 교회가 세워지게 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견디어 나가게 하며 그야말로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게” 하여 주셨기 그것이 가능했지만 그들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그 시대의 하나님 백성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교회를 구성하여 교회의 현실적 모습을 이 땅 가운데서 드러나게 하였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사회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어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사회 속에도 상대적으로 좀더 선하고 옳은 것이 나타나도록 하는 일을 상당히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 세상도 교회에서 하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은 일종의 외경과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어느 정도는 따라 가는 모습을 가지게끔 했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 하나만 들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양반(兩班)과 상인(常人)들을 철저히 구별하는 반상(班常)의 구별이 아주 철저하던 시절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배운 한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상당히 빨리 반상의 구별이 없이 교회의 회원 됨과 직원 됨을 구현한 바 있다. 그리하여 초기 새문안 교회의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님들 가운데 왕가에 속하는 이씨 문중의 이들도 있었고 백정 출신의 장로도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가 아닌가? 이런 것이 세월에 흐름에 따라 점차 교회 밖 세상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 세상이 반상의 구별이 없는 세상이 되어 가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이전 시대 우리의 좋은 선배들이 실천 한 바와 같이 그렇게 진정한 그리스도인 됨과 바른 교회됨을 실현할 수 있을까?

     

        첫째로, 성경을 매우 존중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고 순종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무시할 때 이 세상도 성경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성경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요, 성경을 사랑하던 사람들(Bible lovers)이던 이전 선배들처럼 우리들도 성경을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따라야 할 것이다.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을 비평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자신을 증언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참된 인격자들이 되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실천을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이 세상은 지금 우리들의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듣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향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잘 하다가도 하나만 잘못하면 이 세상은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기독교 학교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드러내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가 운영하는 학교를 기독교 학교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한국 땅에도 수많은 학교들이 기독교의 이름과 연관하여 존재해 왔다. 그 모든 학교들은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며, 또한 하나님의 원칙을 잘 지켜서 이 세상의 다른 학교들도 존경할 정도로 바르고 투명하게 운영해 왔는가? 그렇게 못해 왔기에 이 세상이 우리를 감독하고 간섭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야 말로 모든 점에서 바르게 해 왔었다면 이 세상이 우리를 향해 감독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혹시 그렇게 한다면 교회가 그 불의함을 잘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들이 잘못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 왔기에 세상의 비판에 대해서 강하게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런 저항이 세상에 더 악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제 와서 우리의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기독교 기업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참된 기독교적 사랑을 잘 드러내지 않을 때, 이 세상은 다른 기업을 행해서 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비판적인 언사를 사용하면서 우리들 비판하고 무너뜨리려는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참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기업을 해야 할 것이다.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에 이 땅에서, 특히 반기독교적인 사회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못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업을 할 때에도 우리는 그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야 말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십자가에 근거한 사랑의 화신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제도를 좋게 만든다고 해도 복잡한 문제는 계속 증폭될 것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문제를 깊이 끌어안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말 한마디라도 매우 주의해서 하여 그 누구라도 상처 받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과 삶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루터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랑의 삶과 활동을 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미리 준비하여 적절한 때에 매우 지혜롭게 우리와 이 세상이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天國福音]을 전해야만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지도 않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사랑은 제대로 실천하지 않을 때 이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물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세상은 이제 그것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했고, 우리 안에 소망이 있음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이 세상이 정말 궁금해서 그것을 물을 수 있도록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잘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전달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천국복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적당한 때에 지혜롭게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죽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긴급하게, 지금 여기 와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확연히 드러나 극치(極致)에 이르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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