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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에 있어서 부의 신학적 의미신학이야기 2007. 1. 6. 12:00
(월간 프리칭 3월호에 기고한 글을 미리 소개합니다.)
청교도 신앙에 있어서 부의 신학적 의미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청교도들의 부에 대한 태도는 한편으로는 존중되기도 하면서, 상당히 오해되는 일이 많이 있다. 이런 오해의 대표적인 경우를 우리나라 사회에서의 논의와 연관하면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위한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기본적인 문제점은 “자신들을 위한 부”라는 생각이다. 그들이 부의 축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 자체를 높이거나 그것을 하나님의 호의의 징표로 생각하지 않았다. 청교도 사상에 대한 이런 오해를 잘 드러내고 바른 이해를 제시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청교도들의 부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간단히 정리한 후에 청교도들의 소명관을 살피고, 생성된 부를 사용하는 청교도들의 방식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이 과정을 통해서 청교도들이 부를 이해한 방식이 드러나게 나고 그거에 근거한 우리의 바른 이해가 형성되고 바른 실천이 이루어지기 원한다.
1. 청교도들의 부에 대한 이해
우선 청교도들이 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간단히 일반적으로 말하도록 해 보자. 그들은 부를 그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기 원한 청교도들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은 부 자체를 위해 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들은 진정한 청교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부요해짐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형태의 세속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긴 이들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 자체를 위해 신앙을 이용하거나 하나님을 이용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가르침 받은 대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이들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 전체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이었다. 열심히 산 결과로 부가 축적되는 것을 청교도들은 정당한 것으로 여겼으나 청교도들은 부 자체를 높이거나 그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산 결과로 얻어진 부를 하나님의 축복의 표로 여기거나 부가 축적된 것을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필요한 경우에 부와 명예와 재물과 관계성도 과감히 버릴 수 있었고, 부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다 사용하는 일에 열심이었고, 부와 재물을 상실해야 하는 고난을 기꺼이 감당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했다.
이에 대한 더 정확한 이해는 우리가 다음 절들에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그들의 소명관과 부의 사용 문제에서 더 잘 드러나게 된다.
2. 청교도의 소명관
청교도들은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입장을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건전한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로 부르셔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이라고 하는 소명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점에 있어서 그들은 참으로 성경적인 거룩에 대한 이해, 일상생활에 대한 성경적 이해, 직업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소위 좁은 의미의 종교에 속한 것들만 이 거룩한 것이라는 이해에서 벗어나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거룩한 것이 없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그들이 좁은 의미의 종교에 속한 것들을 무시했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런 것들을 거룩하지 않게 했다고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거룩성의 영역을 확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삶의 모든 영역이 다 거룩한 영역이었다. 어떻게 하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 소명론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인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청교도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청교도는 오히려 이전의 루터 등의 소명론을 실천적으로 잘 드러내어 보여 준 예가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런 이해를 잘 정리해서 <소명론>을 써 준 신학자들이 있었고,1) 그런 이해를 강단에서 성경적으로 강해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있었으며, 그 가르쳐진 말씀에 따라서 그들의 삶 전반에 대해서 성실하게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 수많은 민중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청교도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실천하는 수많은 이들이 청교도를 청교도로 역사 속에 있도록 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그들의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17세기 말 청교도였던 조오지 스위녹(George Swinnock)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당뿐만 아니라 상점도 거룩한 땅으로” 여겨야만 한다고 하는 말이다.2)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장사하는 일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또한 장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장사하도록 하셨는지 하나님의 의도를 살펴서 장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사하는 일에 부정과 자기 이윤 추구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는 장사하는 일에서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도를 실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이해를 가졌었다. 따라서 청교도들의 상당수는 당시 정황 속에서 기술자로서의 일과 장사하는 일(상업), 특히 국제적 상업에 열심이었다. 17세기 유럽에서 청교도적 사상을 가진 이들이 국제적 상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어떤 일을 하든지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도 주께서 불러 시키신 일을 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따라서 수행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그들에게는 자연히 부가 축적되는 결과가 생겨졌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교회의 어떤 이들의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축적된 부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즉, 청교도들은 축적된 부를 하나님이 축복하신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축적된 부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드러내었다.
3. 축적된 부에 사용 문제
이렇게 축적된 부를 그들이 어떻게 사용했는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자연스럽게 축적된 부를 그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데에 사용하였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교회와 다른 교회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세워 가는 일에 사용하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제대로 세워져 나가는 일은 그들의 최대의 관심이었다. 그래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다른 나라로 피신하여 나가 프랑크프르트나 제네바 등지에 영국인 피난민 교회로 있기도 했으며, 엘리자베뜨 1세 휘하에서 어느 정도의 종교적 자유를 누릴 때에는 다른 지역의 피난민들이 와서 런던에 외국인 피난민 교회가 있도록 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또한 이런 외국인 피난민 교회는 자국 내서 고난 가운데서 비밀스럽게 개신교 예배를 위해 모이고 있는 성도들 소위 “십자가 아래의 교회”(the church under the cross)를 신학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예를 들어서, 안트베르프(Antwerp)의 개혁파 교회가 사라지게 되었을 때나 화란의 개혁파 교회가 어려울 때 런던의 피난민 교회가 준 도움은 매우 큰 것이었다. 런던에 있던 이탈리아 개혁 교회가 국제적 칼빈주의 운동에 기여한 공도 매우 큰 것이다. 이와 같은 일에 청교도적 정신을 지닌 상인들과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소위 “국제적 칼빈주의”(international Calvinism)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이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청교도들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되고 그 합리적 결과를 내도록 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런 그들의 노력의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소위 “청교도적 강해”(the puritan lectureship)의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따로 경비를 부담해 가면서 교회의 정규 예배가 아닌 시간에 성경 강해하는 시간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비록 자신들이 정규적으로 헌상하는 것 이상으로 교회에서의 말씀 이해를 위해 재정 부담을 해야 하지만 청교도들은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면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위해 힘을 쓴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주변에 사람들을 돕는 일에 일심이었다. 청교도들은 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데 열심히 있었으므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열심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런던의 외국인 피난민 교회들에 대한 청교도들의 정신적 물질적 지원은 매우 큰 것이었다. 특히 청교도적 장로교회나 개혁 교회에서는 집사직을 가진 이들이 장로 교화의 전통에 충실하게 집사직을 감당해 나갈 때 그들은 주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돕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
넷째로, 그들은 교육과 출판에 열심이었다. 청교도 중의 상당수는 출판업에 종사하였고, 수많은 청교도들은 이들 청교도 출판업자들이 내는 종교적 서적을 열심히 읽는 좋은 소비자 역할을 하였다. 성경과 찬송가, 중요한 종교적 서적을 그리 비싸지 않은 값에 보급하려고 애쓴 청교도 출판업자들의 노력이 가상하고, 열심히 좋은 소비자가 되어 그들로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일로 말미암아 파산하지 않도록 한 일반 성도들의 노력이 귀한 것이다. 심지어 하녀들도 그 손에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집이 들려 있었다고 하니 당시 청교도들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열심은 이와 같이 폭 넓은 것이었음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부를 주로 하나님 말씀의 진전과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일에 사용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매우 검소한 삶을 지향해 나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많은 재화가 사용된다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을 위해 많이 헌신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신들을 위해서는 매우 검소하나 하나님 말씀의 진전을 위해서는 부요했던 이들이라고 규정하면 청교도들을 그들의 재물 사용관과 관련하여 잘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면서
청교도들의 이런 이해가 지금 여기 사는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우리나라에서의 정황과 관련해서 우리는 첫째로 청교도들이 부 자체를 높이거나 이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본받아 가야 할 것이다. 부유한 것을 축복받은 것의 표나 가난한 것을 저주 받은 것의 표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매우 상식적인 생각을 강조해야 하는 우리의 정황이 매우 안타깝다. 우리는 부와 가난에 억매여 있는 이들이 아니고, 부와 가난이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이들이 동등함을 청교도들은 매우 강조했다. 그런데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상당수는 이런 바른 이해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듯하다. 특히 몇 년 전에 “여러분 부자 되세요”를 외치던 소리나 2007년의 황금 돼지해와 관련한 사람들의 이해와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나 소원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더 이 기본적인 요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부와 가난이 축복이나 저주의 징표가 아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정황 속에 있든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따라서 그 안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명론도 청교도들이 칼빈 등에게서 받아 들여 자신들에게 적용하며 열심히 실천한 것처럼 우리도 실천해야 할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기에 더욱 더 열심히 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 주님의 일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요즈음은 신학교에 가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고 있는데, 이것이 이런 건전한 이해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감소하며 주님께 진정으로 헌신하는 이들이 줄고 있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살a의 영역 전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뜻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청교도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는 검소하게 사는 사람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들은 흔히 희화되듯이 지나친 수전노 같은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숨 막히는 삶을 산 것이 아니었다.3)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적당한 의복과 음악과 미술과 음료 등을 잘 사용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그들을 자신들을 위해서는 검소하게 사는 이들이었다.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소비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사회 속에서는 다시 한 번 더 이런 검약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넷째로, 이는 사실 다른 사람들과 교화와 선교 등을 위해 우리가 사용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도 17세기 청교도들이 바른 교회를 국내와 국외에 세우고 지지해 가는 일을 위해 자신들의 상당한 재산을 다 드리던 그 모습을 본받아 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과연 바른 교회를 위한 활동인가 하는 것을 잘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바른 일을 위한 진정한 헌신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 교회는 열심히 헌금하고 헌신 하는 교회였었다. 그러나 이제 좀더 사려 분별에 근거하여 헌상하고 자신들을 기꺼이 드림으로 이전 선배들의 헌신을 더 값지게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도 청교도들에게서 있었던 바와 같은 책과 학문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우리들이 내는 책과 청교도들이 내던 책을 비교해 보고 우리들이 읽는 책들과 청교도들이 읽던 책들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17세기 우리 선배들의 하던 그런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일고 있는가? 아니면 소위 종교적 서적을 읽어도 유행과 감성적 측면만을 자극하는 것을 좇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고 바른 진리를 추구해 가도록 하는 책들이 좀더 많이 출판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고, 그런 책들의 도움으로 우리 모두가 더 성숙해 가는 교회들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바른 말씀의 도리를 잘 드러내는 신학교와 그런 것에 근거한 일반 학문적 작업을 돕는 일을 위해 우리도 청교도들처럼 헌신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청교도들에게 캠브리쥐의 엠마누엘 컬리쥐(Emmanuel College)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 그런 역할을 하며 진리의 빛을 비춰주는 곳을 향한 열망이 강하게 있어야 할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더해 간다. 그런 헌신자들이 우리에게도 많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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