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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락한 인생의 헛된 삶 한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학이야기 2007. 1. 12. 15:58
     

    󰡔교회와 문화󰡕 18권 권두언 미리소개합니다.


                 타락한 인생의 헛된 삶 한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성도의 삶의 인도자 역할을 하는 점에서는 명료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린 아이나 공부를 깊이 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잘 살피면서 잘 읽으면 기본적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억지로 해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풍성한 함의는 오늘 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애를 써서 성경의 가르침을 찾아 왔지만 그 충성한 의미를 다 드러내었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성한 책이다. 이런 다양한 성격을 지닌 성경은 항상 우리로 그것을 펴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 책을 읽고 그 의미를 우리에게 적용하도록 해준다.

     

         이 성경 가운데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책의 하나가 이번에 특집으로 다르고 있는 전도서이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며, 욥기 전체의 구조 가운데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이 전도서의 각 진술들은 그것이 과연 어떤 입장에 있는 이가 하는 말인가 하는 것을 찾아 해석한다고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책이 기본적으로 타락한 상황 가운데서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생들의 삶이 헛되며(전 1:2, 12:8), 따라서 전도서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타락한 상태 가운데 있는 이 인생이 다 헛되다고 하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는 것이 가장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전도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 기본적인 가르침에 관한 한 명료성을 말할 수 있고, 이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잘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그리고 아름다움을 향해 창조하셨으나(전 3:11, 7:29)) 인간들이 꾀를 내어서 문제 거리로 만든 이 인간과 인간의 삶(문제 거리요 문제투성이인 인간과 인간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 거리인 타락한 인간의 삶이 헛됨을 잘 들었으니 그, 모든 것을 잘 파악한 사람들답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의 태도로서의 하나님 경외), 그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삶의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명령). 이것이 사람의 본분, 직역하면 “사람의 모든 것”(ם󰕇אָ󰕗- 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할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선악간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전 12:14). 여기까지는 아주 자명한 것이어서 거의 모든 이들이 이를 강조한다. 모든 이들이 다 파악할 수 있는 가르침은 그것이 너무 자명하기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우리 모두에게 매우 자명하게 주신 말씀의 교훈으로 여기면서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도서는 허무주의 이야기기 아니라 타락한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 가운데서 유밀하게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성경 전체의 빛에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는 말을 일종의 유대주의적 율법주의나 펠라기안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 경외가 이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 명령을 지키는 것을 지배하는 기본적 태도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전도서의 기본적 메시지를 유대교적 율법주의나 펠리기안주의로 오해하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로 서 있는 이가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순종과 명령을 따르는 것을 공로로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는 하나님과 자신의 근본적 차이를 잘 알고서 그에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다.(전 5:1-2)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는 마땅히 하나님을 순종하지만 그것을 마땅하고 당연한 일, 즉 (여러 역본과 우리 말 개역 성경이 잘 의역하고 있듯이) 사람의 본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자신의 일들을 그 어떤 의미에서도 공로로 여기지 않게 된다. 혹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어떤 의미로라도 공로화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빛에서(이를 과거 우리의 선배들은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라고 하였었다) 보았을 때 더욱 자명하고, 사실 전도서 본문의 빛에서도 어느 정도 시사되고 있듯이, 전도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결코 유대교적 율법주의나 펠라기안주의적 함의를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전도서의 이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여러 말들이 과연 어떤 위치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인생의 헛됨을 말하는 여러 말들에 대해서는 해석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것은 전도서의 앞과 뒤에서 명확히 말하는 대로(전 1:2, 12:8)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삶의 모든 측면이 근본적으로 헛됨을 보여 주는 다양한 사례들로 언급될 수 있다. 하나님과 관련 없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오중의 헛됨의 구조 아래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관련 없이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1:3, 14, 2:17-20, 22-23), 새롭다고 하는 것(1:10), 얼마간만 계속되는 기억(1:11, 4:16), (하나님과 관련 없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지혜와 지식(1:16-18, 2:15-17, 4:14, 6:8), (하나님과 관련 없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낙과 웃음(2:1-3), (하나님과 관련 없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사업과 여러 경영들(2:4-11), (하나님과 관련 없이) 사는 일 자체(2:17), (하나님과 관련 없이) 재판하는 것과 (하나님과 관련 없이) 공의를 추구하는 것(3:16-17), 학대 받는 삶(4:1), 홀로 열심히 사는 삶(4:8), 어리석은 통치자의 삶(4:13), 많은 일 때문에 생긴 꿈들과 많은 말로 인해 나온 우매자의 소리(5:3, 7, 10:12-14), 재물 추구(5:10-17, 6:2), 많은 자녀와 장수(6:3), 먹는 일(6:7), (하나님과 관련 없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의로움(7:15-17), (하나님과 관련 없이) 여러 책을 짓는 것, (하나님과 관련 없이)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12:12) 등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리하여 전도서 기자는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하는 자가 더욱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4:3, 6:3-6)).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 없이 사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는 삶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전도서의 근본적인 교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일이 우리에게 강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타락한 우리의 삶은 그 형태는 다르나 다 일반이요, 다 헛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렇게까지도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9:2). 왜냐하면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은 비록 제사를 드리는 외적인 종교적인 일을 하고, 의롭게 행하는 외적인 윤리적인 삶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자면 모두의 삶이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이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9:3).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삶의 자세) 하나님의 명령을(삶의 규범)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서 해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이 기본적 가르침을 전달하는 과정 가운데 나타난 곳곳의 긍정적인 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인생의 헛됨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지혜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것도 헛된 것 가운데 하나인가? 아니면 그것은 최종적 결론과 같은 입장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인가? 어떤 것은 전자에 속하고 어떤 것은 후자에 속하는 것인가? 본문 자체에 두 가지 해석을 향하도록 하는 시사가 있는 것들이 있으나(2:26, 4:4-6, 4:13-16, 6:9, 6:12, 8: 6, 7, 9:15-16) 본문 자체가 그것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도 부정되어야 할 것인지 하는 것이 논란인 부분이 많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본문들인 2:24, 3:12-13, 22 4:9-12, 5:18-20, 7;1-14, 8:3-5, 8:15, 9:7-10, 9:17-18,; 10:1-4, 10:8-15; 11:8 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것들이 인생의 헛됨을 생각한 일종의 종교적 괘락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이것이 진정 전도서의 종국적 가르침과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하기 보다는 열려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이런 해석도 해 보고 저런 해석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 두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아주 명확한 해석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로서는 명확히 답할 수 없으나 그 중에서 어떤 해석이 더 나은 것인지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내면서 절대화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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