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르트 대회 400주년을 기념하면서
    신학이야기 2020. 12. 25. 14:41

    한국개혁신학59 (20188): 4-9에 실린 권두언을 여기 다시 실어 보다 많은 분들이 일도록 한, 일고서 유익을 얻기 바랍니다.

    ----------------------------------------------------------------

    도르트 대회 4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승구 (한국개혁신학회 회장/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1618-1619년에 네델란드 도르트에서 열렸던 도르트 대회(the Synod of Dordt or the Synod of Dordrecht) 40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국개혁신학회는 2018년 봄에 논문 발표회를 가졌었고, 그 중의 몇 논문과 여러 다른 논문들을 합하여 이 학술지를 발간합니다. 2014328일에 한국장로교신학회 23회 논문 발표회에서 도르트 대회와 한국 교회를 논의하는 한국에서의 첫 학회를 하였고 (이에 대한 기사로 다음을 보라: “장로교 신학회 23회 학술발표회-도르트 총회와 한국교회”, available at: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7077. 그 내용은 장로교회와 신학11 (201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번에 이 문제를 다루는 두 번째 큰 학회를 가졌습니다. 앞으로 국내외서 올해와 내년에 여러 학술적 모임들이 16181113일에 시작되어 1619119일에 있었던 154회에 걸친 도르트 대회의 모임과 그 결정문에 대해서 앞으로 계속 논의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총회와 관련해서 몇 가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특히 2014년에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세 사람의 전문가인 Donald Sinnema, Christian Moser, Herman Selderhuis의 편집으로 도르트 대회의 회의록이(critical edition)이 처음 발간된 이후로 이에 대한 논의가 많이 나왔고, 또 나올 곳이다. Cf. Acta et Documenta Synodi Nationalis Dordrechtanae (16181619), eds., Donald Sinnema, Christian Moser, Herman Selderhuis, vol. I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4).).

     

    첫째로 이 총회는 개혁파 교회의 국제적 총회였다는 것입니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와 같이 생각하는 것도 개혁교회 안에서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 도르트 회의를 있게 한 기본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개혁 교회 안에 아르미니우스처럼 생각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 하는 분위기가 많이 있습니다. 17세기에 네덜란드에소위 항론파(the remonstrants)5개 조항의 문제에 있어서는 개혁파 정통주의와 입장을 달리하면서, 항론파와 같이 생각해도 자신들도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이고 이렇게 믿는 것도 개혁파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하자는 논의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분들이 <1610년 항론>(the Remonstrance of 1610)을 제기 함으로 더 분명한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분들을 항론파라고 합니다. 아르미니우스와 입장을 같이 하는 여러 항론파 목사님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교우들의 입장은 베자나 칼빈의 입장에 철저하게 따르지 않아도 개혁파 교회 안에 있을 수 있고, 또 결국은 다른 분들도 자신이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가 네덜란드 교회 안에 여러 해 동안 논란거리가 되자 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같이 모여 개혁파 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한 것이 도르트 회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문제를 단지 네덜란드 교회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당대 개혁파 입장을 대변하는 모든 분들을 다 초청해서 그들의 의견서를 내도록 하고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개혁파 교회의 입장을 정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핍박받고 있던 프랑스 국내 사정상 전혀 올 수 없었던 프랑스 개혁 교회의 대표석만 비워져 있었다는 것이 이것을 잘 드러내어 줍니다. 프랑스 개혁 교회의 대표들도 마땅히 와야 하는데 오지 못할 상황에서 그들의 좌석을 비워 놓았다는 것도 의미 있지 않습니까? 본래 우리는 이렇게 모든 나라의 대표자들이 함께 의논하는 모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지요. 여러 모로 비록 여러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당대의 교회가 얼마나 실력 있는 교회였는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흔히 말하는 국제적 칼빈주의”(International Calvinism)가 명확히 나타난 것입니다(Cf. Menna Prestwich, (ed.) International Calvinism, 1541-1715 (Oxford: Clarendon, 1985); W. Fred Graham, ed., Later Calvinism: International Perspectives (Sixteenth Century Journal Publishers, 1994); Ole Peter, “Merchants and Ministers: The Foundations of International Calvinism,” in Calvinism in Europe, 1540-1620, (eds.), Andrew Pettegree, A. C, Duke, and Gillian Lewis (Cambridge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Graeme Murdock, Calvinism on the Frontier, 16001660: International Calvinism and the Reformed Church in Hungary and Transylvania, Oxford Historical Monograph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이 논의 과정을 걸쳐서 과연 개혁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아주 분명히 하여 알미니우스와 그를 따르려고 하는 분들이 보여 준 조금의 양보를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도 동시에 개혁 교회는 항상 사람의 책임과 자유의 문제를 아주 명확히 견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다는 것이 운명론을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아주 명백히 한 것입니다. 여기에 개혁파의 성격이 명확히 나타납니다. 때때로 칼빈주의(Calvinism)를 신봉한다고 표현되기도 하는 개혁파(the Reformed)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 자유를 모두 굳건히 붙잡는 입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것이 도르트 회의의 결정문’(the canons of Dordt)에서 아주 분명히 천명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는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를 용인할 수 없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책임과 지유를 방기하는 듯이 보이는 초칼빈주의(Hyper-Calvinism)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 초칼빈주의(hyper-Calvinism)은 칼빈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아주 명확히 한 것입니다. 너무 분명한 이 요점을 잘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이를 다시 명확히 밝힙니다. 초칼빈주의(hyper-Calvinism)는 칼빈주의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후기 논쟁에서는 이단이라고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둘째로, 그 핵심적인 내용은 실제 역사 가운데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구속(atonement)은 그 유효성에 있어서는 영원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만 그 효과가 미치도록(efficient for the elect only) 의도하셔서 구속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것의 배경은 성경에서 그들이 발견한 인간의 전적 타락이었고, 따라서 창세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1:3-5), 택자들에게 미치는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끝까지 붙들고 가시는 사역의 결과로 우리들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붙드니 결국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결론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성경적 구원론을 정확히 요약하며,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 것입니다.

     

    셋째로, 이렇게 결정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그들이 교조주의자들이어서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니라 성경을 충실하게 생각한 결과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가르침을 잘 드러내고자 할 때에 알미니우스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면 결국은 교회를 허무는 것이 된다고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그것을 용인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넷째로, 이렇게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명확한 관점을 유지해도 그 시대의 아주 독특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타락에 대한 작정이 선택과 유기에 대한 작정에 앞에 있는지 여부를 가지고 한 논쟁에 대해서는 성경이 어느 입장을 명백히 지지하지 않으므로 그 둘을 다 용인하도록 한 것이 도르트 회의의 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문제를 가지고 회의하면서 최종적 결론을 도출한 분들이 그저 교조주의자가 아님이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작정의 순성에 있어서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제일 먼저 있으니, 당연히 타락에 대한 작정 보다 먼저 있다고 주장하는 타락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모든 작정이 다 창세전에 영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영원에서 있었던 그 작정의 순성에 있어서는 타락에 대한 작정이 창조에 작정 다음에 오고, 그렇게 타락된 것을 보이는 인류 전체 중에서 일부는 선택하시고 일부는 유기 하셨다는 타락 후 선택설 (Infralapsarianism)문제에 있어서 표현은 타락 후 선택설적인 표현으로 진술하지만, 타락전 선택설도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단지 그 입장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서 타락전 선택설만이 개혁파적인 것이고 성경적인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개혁파의 모습이 있습니다.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 앞에서는 아무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견해도 명백히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성경이 이것 저것을 명료하기 언급하지 않을 때는 이것도 저것도 다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개혁파의 모습인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들도 17세기 우리 선배들의 이런 진정한 개혁파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정치적 바람(political correctness)만을 생각하면서 명백히 성경적인 입장에 대해서 눈 감아 버리지 않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용감히 성경적 입장에 서려고 하고, 성경이 명확히 이야기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주께서 하늘에서 더 명확한 가르침을 주시기까지는(in the meanwhile) 이것도 저것도 용인하면서 주어진 성경에 근거해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면서 열매 있는 토론을 계속하는 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입니다. 부디 본회의 학술지인 한국개혁신학을 통해 이런 의미 있고 열매 있는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