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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령님의 신성을 믿습니까?
    신학이야기 2020. 6. 30. 19:47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따라서 성령님도 믿게 됩니다.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온전히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생각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고대의 성령훼손당과 몬타누스주의 등의 이단들을 생각해 보시시오), 지금도 그렇습니다. 유난히 성령님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성향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내어서 과연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 지를 살피고, 우리들의 생각 속에 성령님에 대한 생각이 과연 성경이 가르침과 일치하는 지를 살펴보고, 가장 중요한 일로 그 성경적 성령님과 바르게 관계하며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논의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1: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십니까?”

    성경대로 믿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유대교도나 이스람교도 같은 타종교인들이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미국의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ian Science)라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챤 사이언스>라는 이단에서 유행시킨 것 같이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바른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성령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실질상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성령님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령님께 대해서 명령을 한다든지, 자신이 성령님의 사역을 주관하고 통제할 수 있는 듯이 하는 것이 결국 성령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의도는 없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과연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대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참으로 신실하신 사역자들이 늘 그리하셨듯이, 용어도 성령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심령에서 그렇게 성령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의식하면서 이 용어를 써야 합니다. 그저 용어만 성령님이라고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 중에서 표현하듯이 하나 안에서 삼위가, 또 삼 위 안에서 한 하나님이 경배 받으셔야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참으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아뢰고, 경배해야 합니다.

     

        질문 2: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존숭하는 것 같이 성령님을 존숭하십니까?”

    둘째로는, 자신의 심령 가운데서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만큼 존숭(尊崇)하는 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영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교적이거나 명백한 이단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아니라고 해도 성령님이 성부(聖父) 하나님보다는 조금 못 하시다 든지, 성자(聖子) 하나님보다는 못 하시다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게 생각하는 잘못된 입장을 가지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가 자신의 심중에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상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해도 그것이 성자께서 성부 보다 낮은 위격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듯이, 성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오실 것을 예언하시고(15:26) 그 말씀대로 성령님께서 오셨다고 해서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보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낮은 위격이 아니십니다. 위격상의 동등과 경륜상의 복종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순종의 형태가 보이지만 그 위격에 있어서 삼위는 동등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5:1-11)에서 이 부부가 한 일은 성령을 속이고”(5:3) 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일이 결국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4)라고 선언한 베드로의 말을 우리들은 잘 들어야 합니다. 오순절에 교회 공동체에로 임하여 오신 성령님께서 이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기에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고(5:9)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심이 확연히 드러났고, 그리하여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5:11)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고전 3:16; 고전 12:13; 2:22)은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과 같은 정도로 존숭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위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이 삼위 안에서 아무도 더 먼저 있거나 더 나중 되지 않으며, 아무도 더 크거나 작지 않다. 다만 세 위격 모두가 서로 동리하게 영원하시며 동등하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세 번째 질문이 물어질 수 있습니다.

     

          질문 3: “성령님께 순종하십니까?”

    이 세 번째 질문이 가장 핵심적 질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과연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을 이해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른 것, 특히 자신의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성령님을 이해하고 성령님과 관계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성령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됨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님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대해서 성경에 가르친 것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해야지, 여기에 다른 것을 더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14)고 하시고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6:15)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하신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보존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14:26) 방식입니다. 성령님은 과연 우리에게 오셔서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16:14)고 하시고,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5) 말씀하신 것이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과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알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이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가르친다고 했습니다(고전 2:13).

    둘째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과 성령님을 따르는 것을 동의어로 놓고 논의해 갑니다(8:4-14).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4)고 했으니, 중생하여 하나님을 참된 의미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것입니다(8:17). 이것은 그저 말로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중생하여 영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부르짖음의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신 것이며, 그렇게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갑니다.”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나갈 때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음 질문은 우리가 과연 그렇게 하는지 아니하는 지의 알아보는 한 가지 예 또는 시금석으로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질문 4: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십니까?”

    우리가 과연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배우고 그 배운 것을 표현하는지 아닌지 다음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요한복음 15:26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로서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선 성자께서 아버지, 즉 성부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16장에 성령님이 오실 것을 여러 번 언급하시는 중에서 여기서는 성부로부터 성령님이 보내어진다는 새로운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는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는 우리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놀라운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현세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님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아주 놀라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서는 이 요한복음 15:26의 어귀를 따라서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의도는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성을 분명히 하면서 성부님과 성령님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쓰다 보니 과거 동방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이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 하신다는 종속설, 즉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하신다는 견해, 즉 성부가 좀 더 높으시다는 견해를 자꾸 생각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종속설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톨레도(Toledo)에서 모인 <톨레도 제 3공의회>(589)에서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고 표현하여 성자로부터도라는 어귀를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더 넣었습니다. 왜 그랬다고 했습니까? 성자가 더 못한 분이시다는 종속성을 막고, 성경을 따라 성령님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표현하는 본래의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서방 교회의 전통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런 의도가 성경이 가르친 가르침의 진정한 의도를 잘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 12항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또한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성령님은) 만들어지신 것도 아니고, 피조된 것도 아니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입니다.

     

    질서에 있어서는 성령님이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시지만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며(of one and the same essence),

    권위와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성령님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로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과연 성경이 가르친 대로 여러 면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하는 지를 묻고, 더 나아가서 그 성령님께 과연 순종하는 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는 결국 성경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신학자로 불리는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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