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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자의 윤리적 도전에 대하여 반응하는 신학적 과제
    신학이야기 2019. 5. 4. 18:33

    <한국 개혁신학>  62 (2019)의 권두언의 일부를 여기 실어 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한국 개혁신학회의 학술지인 <한국 개혁신학>도 읽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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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어떤 분이 철학이 질문을 하고 신학이 그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신학을 하려고 할 때 그 철학적 질문이 이미 대답의 한계를 규정하여 결국은 철학이 신학을 규정하는 결과를 초래한 일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적(modern)이거나 혹 후-현대적(post-modern)인 문화가 우리의 대답을 미리 규정하려고 해서도 안 될 것이고, 근자에 도전의 원천 중 하나인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우리의 신학적 대답을 미리 규정하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앞으로 나올 신학적 대답을 미리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문화나 과학 기술이 제기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진지한 성찰을 위해 매우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과거 문화나 현재 문화적 방향성이나 발전하는 과학 기술이나 세속 국가의 모든 작동 방식이 우리에게는 다 중요한 성찰의 자료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과 세상의 과정 전체가 우리의 성찰 대상이 됩니다. 그런 성찰의 대상됨을 제한하는 것은 없는 듯합니다.

     

    단지 그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참으로 기독교적으로 성찰한다면 그것이 일종의 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대상이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제기하는 문제와 문제 상황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적으로성찰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통주의 개혁신학은 이런 맥락에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이 용어는 매우 폭 넓은 함의를 지닌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말이 우리에게는 오직 성경이 말하는 것이 최종적 권위라는 함의를 지닙니다. 다른 모든 것도 생각할 수 있고, 또 생각해야만 하지만, 결국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증(自證)하시는 말씀을 따라서 대답하려고 하고 그것을 모든 문제에 대한 결론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이후의 소위 현대인들”(modern people)은 이에 동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계몽주의 이후를 살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바를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아주 귀한 분들입니다. 그런 태도를 우리는 지속적으로 가져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현대 또는 소위 후-현대 또는 현대-이후(post-modern)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대개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성경을 따르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성경을 온전히 따라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 대답이기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하면서 결국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땅히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만, 현대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문제나 과학적 문제는 매우 복잡해서 그에 대해서 성경은 답을 주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결국은 이 세상이 말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대개 많이 생각한다고 하는 분들이 취해 나가는 이런 두 가지 방식은 결국 매우 교묘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놓고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틀렸다고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이 새로운 방법을 취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따르려고 한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방식으로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일에 대해서 그리하겠다고 대답하고서는 실상은 그것을 하지 않는 아들과(21:28-29 참조) 같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해석학적인 의심을 하는 것의 심각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믿지 않으려고 하든지, 성경을 따른다고 하면서 결국 성경은 인간의 말이라고 하든지,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그 순간에만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실상 이 땅 가운데 있는 모든 정황 속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을 수 없게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보다는 좀 나은 것처럼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서 그 모든 해석은 다 인간의 해석이니 그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뿐이라고 하는 태도를 취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의 다양한 해석들은 결국 우리들을 해석학적 다양성을 드러내는 시장에로 인도하여 그 속에서 길을 잃어 결코 바른 길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일이 많은 듯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은 그저 표어로만, 그리하여 결국은 그 의미가 상실되는 방식으로 무의미하게”, “헛되이언급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성경을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해석적 과제가 면제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를 잘 살피면서(tota scriptura) 제대로 해석해야만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과정(historia revelationis)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계시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의 과정과 관련해서 바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심각한 주해의 과정을 통해서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문맥에 적용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배아 복제, 유전자 편집 등과 같이 성경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는 문제들에 어떻게 성경의 의미를 적용하야 하는가 하는 적용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주해를 통해 찾아낸 성경적 원리가 우리들의 구체적 정황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의 상황이 바뀌어도 같은 성경적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에 상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성경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들은 상황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하면서도 상황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양한 정황 속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말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이런 과정이 우리의 기독교 윤리적 대답을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과 그런 기독교 윤리적 대답을 가지고 실천하는 일에서도 우리는 성령님을 철저히 의존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님께 이존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해의 처음부터 실천의 장에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성령님을 의존해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윤리는 결국 성령의 윤리가 됩니다.

     

    기독교 윤리에서 만아 아니라 비로 이것이 우리의 모든 신학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학은 모든 정황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매우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하는 신학입니다. 우리는 진공 상태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미세 먼지와 초미세먼지 속에서 우리들의 구체적인 모든 문제를 가지고 신학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문제에 휘둘리지 않고, 절대적인 하나님 말씀에 의존하여 신학하면서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신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신학은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해 하는 신학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우리가 그렇게 작업하여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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