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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르트 회의 결정문의 의미(1): 전적 타락!, 그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신학이야기 2018. 7. 26. 08:16

    도르트 회의 400주년을 기념하여 <기독신문>에서 연재물을 마련하였습니다. 서론의 논의와 역사적 배경 설명에 이어서 이제 그 내용을 살필 때가 되어 그 첫째 내용에 대한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본래 섰던 글을 여기 실어 보다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니 다들 읽고 유익을 얻었으면 합니다. 이것이 더 자연스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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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르트 회의 결정문의 의미(1): 전적 타락!, 그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1618-1619년에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인 도르트레흐트(Dordrecht) 시에서 열렸던 17세기의 국제적 교회 회의”(council)였던 도르트 회의의 결정문(Canons of Dordt or The Decision of the Synod of Dort on the Five Main Points of Doctrine in Dispute in the Netherlands)의 의미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 가장 처음으로 모든 논의의 기본적 전제처럼 여겨지는 전적 타락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후에 논의하겠지만, 우리가 흔히 개혁파 교부들(Reformed Fathers) 또는 개혁파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언급하기도 하는 이 회의에 모였던 귀한 분들의 생각에 있어서 형식적으로는 이보다 더 근원적인 전제는 우리의 믿는 바의 모든 것에서와 특히 그것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충실하려는 것이었다. 오직 성경의 사상과 표현에 충실하려다 보니 타락 이후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소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라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의식과 그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이분들은 교조적이어서 이와 같이 결정했다는 논의들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 분들은 오직 성경에 충실하게 생각하려다 보니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정황을 충실히 드러내고 그로부터 다른 모든 문제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1. 전적타락? 그것이 뜻하는 바가 아닌 것과 그것의 진정한 의미

     

    신학의 용어들 가운데서 가장 많이 오해되는 용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이다. 무선 우리 선배들이 이 용어를 쓸 때 그들이 의도한 바가 아닌, 즉 사람들이 오해하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지적하는 일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그것은 이 용어를 쓰면서 인간이 거의 사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타락했어도 사탄이 아니데 왜 전적 타락이라는 말을 사용하느냐는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이 용어를 오해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과거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인간이 거의 사탄처럼 되었다는 의미로 이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를 쓴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과거 개혁파 성도들은, 그리고 오늘의 개혁파 성도들도 타락한 사람들도 비록 타락하였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확한 이해였다. 그것을 이해할 때 과거 개혁파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라는 소위 원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는 완전히 상실되었고,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사람다움은 일그러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괴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deformed image of God)이라는 말도 써서 표현한다. 그럴지라도 이렇게 타락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타락한 사람이 마치 사탄과 같다고 생각한 개혁파 신학자들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전적 타락이란 말을 사용할 때 우리 선배들이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성질 가운데서 인간의 타락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결정문 3.1 ). 일단은 타락의 역사성을 아주 분명히 의식하면서 이 논의가 주어지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교부들과 이전 신실한 사람들과 함께 17세기 개혁파 정통신학자들도 타락 이전의 상태인 무죄 상태(status innocentia)가 역사적으로 있었음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역사적 타락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런 상태에 있지 않고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이 타락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그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죄로 물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결정문 3.1 ), 그 죄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결정문 3.3)는 것을 전적 타락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는 인간의 모든 부분이 죄로 물들어 있는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total corruption)과 그 인간은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전적인 무능력(total inability) 상태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의 구체적인 의미이다.

     

    2. 도르트 회의 정황에서의 그 의미

     

    다 알다시피, 도르트 회의는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와 비슷하게 생각하게 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도 개혁파적인 생각으로, 또는 성경적인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논의 때문에 모여진 회의였다. 알미니우스를 따라서 생각하던 사람들도 타락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을 행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나, 적어도 구속된 상태에서는 은혜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공로(meritum)가 어느 정도는 있다고 주장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자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타락한 사람들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있다고 한 것이다. 타락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은 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 한 것이다. 다른 분들이 후에 논의할 논의를 미리 언급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영원 가운데서 그렇게 미리 보여진 신앙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고 알미니우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장했던 것이다(도르트 회의 결정문, 오류 1.c와 반박).


    토르트 회의에서 정통파 개혁신학자들은 이런 것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2:1)과 같은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영적인 죽음이 아주 실질적인 것이어서 인간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영적인 죽음 상태에서 스스로를 일으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사람들도 다른 것은 할 수 없는데, 적어도 복음이 전파되면 그것을 믿을 수는 있지 않느냐고 한 것이다. 타락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자신을 일으킬 수도 없고, 스스로 회개할 수 도 없다고 한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17:9) 또는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13:23) 같은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는 하나님께 돌이키거나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시면, 오직 거기에만 희망이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도 오직 성경에 충실하려는 사유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31:18). 이와 같은 말씀에 근거해서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2:5)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은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는 말에 진심으로 동감하던 루터와 그 심정을 같이 하면서, 사람들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고(3:23), 주님을 믿는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르트 회의 결정문 제 1.5),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셔서 주님을 믿도록 하셨다고 고백했던 것이다(도르트 회의 결정문 3.11, 12).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적인 부활, 즉 중생을 주셨을 때에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는 하나님께 돌이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한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서로 물을 때에(10: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하신 말씀인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0:27//19:26)는 말씀을 그들은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그저 성경에 충실해서 생각하고 표현하기를 타락한 상태의 사람은 모든 면에서 죄로 물들어 있고 심각하게 오염된 존재라고 한 것이고, 그 영적 어두음과 영적 사망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 날 수 없느니 스스로는 믿음 수도 복음을 받아 들 일 수도 없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전적 부패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였다.


    이렇게 성경에 충실하게 생각할 때에 복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것인지가 나타났다. 인간을 영적으로 다시 살리시어 모든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구조 방식인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믿게 하신 것이니(결정문 3.16), 복음은 그야말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는 놀라운 소식이고, 우리들의 영적인 어두음을 제거해 주신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하셨다(결정문 3.12)는 이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 때 진정 하나님께 감사하여 너무 황송하여 전적인 헌신을 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결정문 3.15). 영적으로 일으킴 받아 영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진정으로 복음을 깨닫게 되고, 깜짝 놀라면서 그에 깊이 감사하여 주를 위하여 열심히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 이해에서 바라보면, 최소한 복음을 깨닫고 주님을 믿을 수는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분들의 생각은 인간에게 최후의 한 가지 여지는 두려는 시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인간의 타락은 인정한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도 스스로 복음을 깨닫고 그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는 있다고 한 것이니 결국 구원의 마지막 고리는 인간의 손에 맡겨진 것이 되어,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참으로 든든한 구원의 금사슬(the golden chain of salvation)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된다고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 스스로 복음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알미니우스의 생각은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 다 하신다(monergism)는 복음에 충실하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알미니우스주의은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력주의(synergism)를 주장하는 것이고, 성경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3. 현대적 의미

     

    이 모든 논의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형식적으로는 과연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가, 오직 성경에 충실한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전적 타락을 말하던 우리의 선배들은 교조적이어서 이 주장을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에 충실하게 생각하고 말하여 전적 타락을 말한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타락한 인간의 실상에 충실한가?” 따라서 복음의 살리는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과연 하나남께서 행하시는 창조의 능력에 부합한가?” 하는 것이다. 알미니우스적인 사고는, “인간 스스로가 선행을 행하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펠라기우스주의와는 다르고,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인 후에 인간이 행하는 선이 그 자체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골로가 잇지 않다고 주자하는 점에서 반()-펠라기우스주의와도 다르지만, 결국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복음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지막 한 고리를 타락한 사람에게 허용한 것이 된다. 그래서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은 이런 생각을 성경적인 것이라고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개혁파 정통주의의 이런 사유의 태도를 과연 우리도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전적 타락을 구호로만 외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게 말하게 된 그 원인에 따라서 우리들도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에 충실하게 생각하려고 하고, 그 내용에 따라서 결국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는 가장 심각한 비관주의(pessimism)를 가지고,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낙관주의(optimism)를 가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런 생각은 그렇게 인기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우리들은 항상 성경에 충실하게 사유하고 실천해 가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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