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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단 한국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 그것은 왜 문제인가?
    우리사회와 기독교 2018. 8. 31. 18:23

    <신앙세계> 2018년 8/9월호에 나온 다음 글을 보다 많은 분들과 나누기 위해 여기 올려 생각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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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 한국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 그것은 왜 문제인가?

     

     

    우리나라가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면 이 문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가 분단된 상태가 아니고, 또한 다른 나라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 가운데 있다면 우리나라도 모병제(募兵制) 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원하는 사람들만 군대에 가면 된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국민개병(國民皆兵)제가 아니었을 것이니, 본인들이 여러 이유에서 군대가 적절하지 않다면 본인이 선택해서 군대와는 다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는 전혀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분단된 국가라는 특별한 정황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분단 한국이라는 독특한 상황 속에서

     

    분단을 이런 저런 이유로 영속화 내지는 장기화하려는 세력들이 항상 있어 왔고, 지금도 있는 듯하다. 이런 분단 상황은, 일반 은총 가운데 살펴 볼 때, 여러모로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최악의 상황은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고, 혹시 평화의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해도 궁극적 대립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안에 군대가 존재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죄악된 이 세상 속에서 군대는 일종의 필요악이다. ,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조직이다. 특히 분단된 나라라는 이 독특한 상황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군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군대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무력 충돌을 억제하는 중요한 방안이다. 그러므로 군대는 결국은 그 자체가 있지 않기를 지향하는, 그리고 결국은 없어져야만 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금은 우리에게 강력한 군대가 있어야만 최후의 무력 충돌이 저지될 수 있다. 그래서 군대를 "필요악"이라고 표현했었다.

     

    더구나 우리와 같은 독특한 분단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군대가 있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군대의 유지와 발전은 남북한의 무력 대립을 막기 위한 방안의 하나이다. 그런데 만일 국민들이 군대에 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에게는 강력한 군대가 있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있을 수도 있는 대립 상황에서 북한 군대를[즉, 인민군을] 돕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군대는 일차적으로는 우리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또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여러 장치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있는 군대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이 독특한 분단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이 상황 때문에 모두 병역의 의무를 다 해야 하고, 또한 이 사회와 우리나라가 그것을 요구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멸시와 낮추어 봄은 바로 이 분단이라는 독특한 정황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극단적 평화주의 가능한가?

     

    이와 같은 군대의 자기 모순적 정체성은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고 어디서나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런 군대는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여 오시기 전까지는 계속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열방을 다 심판하신 후에라야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는 그 예언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2:4: 4:3). 그 때에 주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다(21:4). 그 전에도 우리는 서로 전쟁하지 않고 평화를 이루려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까지 이루려는 것은 그저 상대적 평화일 뿐이다. 또한 그 일을 위해서도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극단적 평화주의의 주장은 사실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 주변에 있어온, 그러다가 재세례파에서 강력히 주장된 이 극단적 평화주의 주장은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극단적 평화주의의 주장에 동의해서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미국의 재세례파 사람들이 미국의 모든 사람들을 다 잘 설득해서 다 극단적 평화주의를 신봉하게 만들었다고 해 보자. 그런 상황에서 예를 들어서 북한이 핵무기로 미국을 공경한다고 할 때나, 중국이나 러시아가 미국을 상대로 하여 전쟁을 선포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런 극단적 평화주의에 동의한 모든 미국인들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온전히 미국을 좌지우지 하도록 내어 즐 것인가? 이 세상에 이런 극단적 평화주의 주장이 있는 것은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고 군대를 강력히 유지하며 강력한 국방력을 유지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런 예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말하는 것을 주님의 뜻으로 여기고 그 말씀을 따르다가 참으로 순교할 것을 각오한 평화주의자들이 아니라면, 적어도 다른 이들이 우리 주변을 든든히 지켜줄 것에 의존한 평화주의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전통적인 기독교회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당 전쟁론에 근거해서 군대가 있을 수 있으며, 군대에서 사격 연습을 하는 것도 가능하며,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에 임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을 보호하는 것이 된다는 복잡한 현실

     

    이에 따라오는 또 하나의 문제로 우리의 이 독특한 상황 가운데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옹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을 보호하는 결과가 된다. 이것도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우리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과 이단이 옳다고 하며 이단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땅에 여러 종류의 이단들이 있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이단들을 돕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든 국민들이 모두 정한 때에 일정한 기간 동안 군대에서 복무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소위 양심에 근거한 병역 거부를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져 가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은 새롭게 도입될 수 있는 대체 복무가 기간적으로나 힘 드는 정도에 있어서 군대에 가는 것 보다 상당히 더 어려운 것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병역을 하는 것을 기피하는 방식으로 양심에 의한 병역 거부를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런 방식으로 대체 복무를 하려는 사람들도 더 어려운 일로 우리 사회와 국가에 봉사했다는 의식이 생겨서 나름의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상대적 박탈감을 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도록 여러 방안을 마련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성원들이 서로를 비판하지 않고 서로를 세우는 길을 찾아 주는 것도 좋은 일일 수 있다.

     

    일단 우리는 분단이라는 이 독특한 정황 속에 있는 한국 사회 속에서 양심에 의한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이 분단이라는 옳지 않은 상황이 극복되어야 한다. 그 때까지는 일단 우리는 양심에 의한 병역 거부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러나 결국 이 분단이 극복되어 우리나라가 모병제 국가가 된다면 이 문제 자체가 극복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 때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각국의 군대가 모두 없어지게 될 것이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그 때에는 가장 정상적인 관계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종국적으로 그것을 바라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 진정한 샬롬(Shalom)이 우리에게 올 때까지 이 땅의 상대적 평화를 위해서 우리 나름의 모든 노력을 다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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