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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에 나타난 생명신학: 생명 존중에 대한 성경적 관점
    우리사회와 기독교 2013. 3. 19. 08:58

     

    성경에 나타난 생명신학:

    생명 존중에 대한 성경적 관점

     

      <신앙 세계> 536 (2013년 3월호):  42-45에 실린 글을 여기 다시 소개합니다. 여러 분들이 읽고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이 시리즈에 있는 김 상득 교수님과 김민철 원장님과 송준인 교수님의 글도 같이 읽으면 유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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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이 생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 같은 세 가지 명제를 강조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명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아주 강조하여야 할 명제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세 가지 명제가 잘 드러나도록 하면 우리는 성경적인 생명 이해를 높이는 것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성경의 생명 이해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성경은 이를 명제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 이야기(narrative)를 제대로 읽다보면 반드시 이 세 가지 명제를 생각하게 되고 이를 존중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바른 신학함의 전형적 모습이 나타난다. 성경 이야기를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개방적으로 읽음 ==>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게 함 ==> 그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바를 명제적으로 진술함 ==> 이런 명제들을 연관시키고 그것이 과연 성경 이야기에 일치 하는 가를 살핌 ==> 그 명제가 제시하는 대로 성경적 삶을 삶 ==> 그 명제들(신학적 진술들)과 순종하는 구체적인 삶을 가지고 성경 이야기를 다시 읽음. 이 과정이 계속 되면 우리들은 참으로 성경에 충실하면서 현실적인 생명 신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세 가지 명제를 하나하나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1명제: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성경 가운데서 스스로를 증언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그에게서 모든 생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 중심적 신학은 생명의 원천되신 하나님, 즉 참된 생명으로부터 시작하고 그가 만든 생명에로 나아가는 생명신학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때 말하는 생명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관찰하는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과 생명 현상으로부터 시작하는 생명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하나님이 생명이심을 알고, 그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 신학은 철저히 위로부터의 신학”(theology from above)일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시고, 그와 관련해서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을 알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풍성한 교제 가운데 계신다. 이처럼 생명은 성부, 성자, 성령의 풍성한 관계와 교제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 풍성한 교제는 그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 외에 그 무엇을 있게 하셔야 할 그 어떤 이유도, 필연성이나 필요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작정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나님 이외의 것에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 신학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를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생명 현상을 지속적으로 붙들고 계신다.” 이 비유적인 표현은 이 세상의 모든 과정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거나 한번 작동하게 하신 후로는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끝까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파생적인 존재인 이 세상은 끝까지 의존적인 존재이다. 도대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적일 때 생명의 생명력이 더 드러나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것은 생명에서 멀어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장 정상적일 때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할 때이다.

     

     

     

         2. 2명제: “하나님은 생명 전체의 주인이시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로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둘째 명제가 나온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 전체의 주인이시다. 우리 자신의 생명 활동을 비롯하여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임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의 것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생명의 현현이다.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독립의 정신과 태도와 삶을 죄악적인 정신과 태도와 삶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다(14:23b). 하나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고 생명적인 것임에 반해서, 하나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하여 살려고 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비정상적이고 죽음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격적인 피조물만이 스스로 하나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피조물로 지음 받은 천사들과 사람들만이 책임을 가지며, 비인격적인 피조물들은 만물의 통치자로 세움 받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축복의 상태에 있게 되거나 저주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천사들은 만물의 통치자로 세움 받지 않았으므로 천사들의 타락이 피조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온 세상을 다스리도록 창조 되었고(1:26-28)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에서 바로 섰더라면 인류 전체와 온 피조계가 온전한 생명과 축복의 상태인 영생의 상태에 이르렀을 터인데, 이 모든 것의 언약적 대표인 최초의 인간들이 실패했을 때에 인류 전체와 피조계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 현상은 대개 이런 상화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생명에 대한 이해도 온전할 수 없다. 인간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상태에서(,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2:1) 일반 은총으로 인해 그래도 물리적 생명을 유지하며 살게 된다. 다른 피조물들은 직접적인 책임은 없으므로 형벌 아래 있는 것은 아니나 인간의 죄악 때문에 지금까지 허무한데 굴복하며 탄식하는 상황 가운데 있다(8:20-22). 인간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을 때 그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 가운데 있고, 몸과 영혼이 분리 될 때까지는 물리적(육체적) 생명만 유지되듯이, 피조계는 비정상적인 상황 가운데 있어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며 온갖 환경 유해적 상황의 희생이 되며 그런 것을 내어 놓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런 생명을 온전케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은 결국 개개인 인간의 생명과 우주적 생명이 다시 온전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이제 다시 온전한 하나님 관계를(, 하나님을 의존하여 사는 삶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믿고 의지하여 동시에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온전한 인간 생명의 모습에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구속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인간은 이제 생명 운동에 동참하게 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생명 운동에 동참한 사람이다.

     

    3. 3명제: “따라서 우리들도 생명 전체를 존귀하게 여기고 살리는 생명 운동에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살리는 운동”[生命運動]에 동참하는 사람들답게 성경에 근거해서 생명 전체를 존귀하게 여기며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첫째는 우리의 영혼과 몸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살아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영혼의 죽음(spiritual death)에서 벗어나 영혼이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하나님 백성 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우리와 주변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앞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영혼만 살아 있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둘째, 우리의 영혼과 몸이 온전히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매순간 살아가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삶 전체, 존재 전체, 신간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사는 삶이다.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여 기도하며 놀라운 일을 이루셨으며 지금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하도록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살피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물리적 (육체적) 생명도 중요시하면서 수정되는 순간부터의 인간 생명을 인간 생명으로 존귀하게 여기며, 따라서 배아를 가지고 하는 실험과 낙태를 반대하는 것이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생명 활동의 주인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활동을 계속하지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생명의 고귀성이 여기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나, 낙태 반대 운동 연합(낙반연)이나 성산생명윤리 연구소나 바른 성정체성 운동연합(바성연) 등의 기독교 생명 윤리 운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셋째로,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도 사람과는 다르지만 생명 활동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고, 사람들이 이들이 잘 살아 가서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도록 사명을 받았음을 생각하면서 다른 피조물들의 생명 활동이 의미 있게 유지되도록 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 전체를 존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혁상인 사람과 다른 피조물의 근본적 차이를 분명히 한다. 인권과 동물권과 다른 피조물들의 생존권을 혼동하거나 착오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가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 자체를 위협하게 되는 형상을 여러 본 지켜 본 사람들답게 책임 있게 피조계에 인공의 힘을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 생명 현상의 온전함이 다 드러나지 않음을 의식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가 초림에서 도입시키신 하나님 나라가 극치(consummation)에 이를 때에야 가장 온전한 생명의 상태가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로 도입될 것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생명 운동에 힘을 다 하면서도 자신들의 노력에 모든 것을 다 걸지 않는 겸손한 삶의 노력을 하여 가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하여 나가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운동, 즉 생명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에 힘쓰면서 이 세 가지 명제가 이 세상에서 잘 새겨지도록 하는 일이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생명 개념을 분명히 하는 것이며, 생명 신학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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