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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 운동 등 다양한 예언 운동의 근본적 문제점신학이야기 2011. 7. 15. 21:18
다양한 예언 운동의 근본적 문제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 이외의 사적인 계시(private revelation)가 있다는 주장을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그런 신비주의가 초기부터 심각한 문제가 되어 왔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웨인 그루뎀 같이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들로부터 상당히 자유롭게 나아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오늘 날에도 특별 계시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성령에 의한 새로운 계시를 말하던 몬타누스주의(Montanism) 등이 이단으로 정죄되었음을 알면서도 다시금 새로운 계시를 말하는 이런 의견들에 대해서 우리는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공정한 평가를 위해 일단 오늘날 예언 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와그너와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 몇몇 저자들이 출간한 목사와 예언자의 건강한 관계를 규정하고 제시하려는 책을 이전에 평가한 내용을 토대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와그너와 그를 따는 분들은 그들의 논의와 활동의 거의 모든 곳에서 오늘날에도 사도들과 선지자(예언자)들이 있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루뎀과 와그너 등의 차이는 그루뎀은 오늘날에는 무오한 계시를 전하는 구약의 선지자나 사도들은 없고 그들을 통해서 주어진 무오한 계시는 그쳐졌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간혹 부정확한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은 오늘날도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비해서, 와그너 등은 오늘날 선지자들뿐만이 아니라 사도들도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와그너 등은 그루뎀 보다 더 나아가는 논의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다고 해도 그루뎀 조차도 오늘날 오류 있는 계시라도 사적인 계시가 계속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와그너의 동료들 중 한 사람인 만스필드는 이렇게 까지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예언자들만이 아니라, 예언하는 사람들을 일으키고 계신다. ... 지혜로운 목회자들의 사역은 진정한 예언적 교회가 이 세대에 일어나리라는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다.” 캔사스 시의 국제 기도의 집(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대표로 있는 마이크 비클은 자신이 목회하는 메트로 교회(Metro Christian Fellowship)에는 예언적인 꿈, 이상, 그리고 환상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한국 교회를 비롯하여 정상적인 교회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유념해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성경 이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계속된다는) 이런 생각은 그 동안 장로교 신학(개혁신학)과 정통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해 온 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 가운데서 1항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어 버렸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진술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과 이런 주장들을 비교해 보라. 이와 같은 노선에서 성경적인 개혁신학자들은 아주 온건한 형태의 예언 인정의 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하여 왔다. 이런 문제에 대한 좋은 개혁신학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레이몬드 교수의 강한 입장을 들어 보라: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예언자들과 방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믿는 것은 그만큼 그가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직 성경의 위대한 종교 개혁적 원리를 버려 버린 것이다.” 그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과 함께 “신약 선지자들의 영감은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쳐졌고,”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직임 속으로 편입되어졌다”고 한다. 한마디로 개혁파 신학에서는 오늘날에는 선지자(예언자)가 없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온 것이다.
물론 오순절파에서는 오늘날도 예언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계속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이 책이나 이와 비슷한 이들의 주장은 정통파 교회, 적어도 장로교회의 가르침과는 대척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교 신학(개혁 신학)의 입장에서는 이 책의 주장을 비성경적이며 반성경적인 주장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 다 어떤 계시의 내용을 더 하려고 하는 이런 주장은 그런 식의 잘못을 범하는 다른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와그너 등은 그들이 말하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시대에는 예언의 양상이 변했다는 점을 말한다. (구약의 참 선지자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 시대에는 참 선지자의 예언도 꼭 성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그 논의에 선 듯 동의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이 저자들은 소위 예언을 하는 이들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와그너 등의 주장은 이전의 직통 계시파보다 그런 입장의 전제에 좀더 철저한 면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1990년대 이후를 신사도적 종교개혁(New Apostolic Reformation) 시대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입장에서 와그너는 사도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교회에서 활동하는 공식 직분으로서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14, 17쪽도 보라). 또한 앞부분에서도 “우리가 수백 년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교회의 성경적 직분 체제를 다시 한번 주목하고 있다”(10)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과 함께 의아함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와그너 등이 말하는 사도라는 말은 좀더 새로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와그너 등의 주장의 좀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오늘날도 사도가 있다는 주장을 와그너 등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적 천재와 주께서 친히 세우신 사도들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첫째로, 사도 시대의 교회에는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교회인데 반해서, 우리 시대에는 그 사도들이 우리에게도 사도이나 그들은 이미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과 함께 “하늘”에 있다는 차이가 있다. 사도들이 생존하여 함께 하던 때에는 사도가 말로나 글로 가르친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계시였었다. 주님의 가르침을 사도들을 통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말로 하든지 글로 하든지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이 성령님의 영감으로 되는 것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오직 이미 성경에 기록된 것만이 사도적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1세기의 그 사도들은 처음 교회의 사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교회의 사도들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째로, 사도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직도 주어지던 시대였는데 반해서, 우리 시대에는 주의 재림 때까지는 더 이상 새로운 계시가 없는 시대이다. 이 시기는 “특별 계시의 시기가 닫혀진 때”이다. 바빙크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때 성경이 종결되어 ...... 특별 계시(revelatio specialis)의 새로운 구성적인 요소들이 지금은 더 이상 첨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고 그의 사역은 성취되었으며 그의 말씀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성경에 성문화된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셋째로, 사도 시대의 이적과 기사들은(τε τέρατα καὶ σημεία) 사도들을 통해 주시는 계시를 확증해 주는 사도적 이적(apostolic miracles)인데 비해서, 우리 시대의 이적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사도적 이적과 같이 계시를 확증해 주며 선포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분명하며,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훈을 우리들의 교회에 적용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유념하지 않는 이들은 사도행전의 교회가 계시를 받았으며, 성령의 가르치심과 직접적 인도하심에 근거해서 살아갔으므로 우리도 그런 성령님의 직접적 가르치심을 항상 기대할 수 있고, 또 그리해야 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과 성경적 사도의 차이를 분명히 의식하지 않는 이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에 있었던 이적과 기사 위주의 사역을 해야 하고, 그것이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잘못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교회에서는 누가 성령님을 속이고 교회의 일을 이 세상적으로 하려는 것인지를 본문의 베드로와 같이 100% 단언할 수 있는 이도 없다. 베드로는 그 일을, 칼빈이 단언하듯이, “성령님의 계시에 의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령님의 그런 계시가 있지 아니하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님과 교회 공동체를 속이는 자에게 죽음을 말할 때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일도 없는 것이다. 이는 성령의 힘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우리들은 베드로와 같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을 주께서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을 주지 않으셨다. 또한 우리는 사도들과 같은 성격의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은 “신적 계시의 신뢰성에 대한 표로서 의도된” 것이고, 따라서 “특별 계시의 시기가 끝났을 때에 자연스럽게 그쳐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도 시대의 교회와 우리들의 교회의 시대적, 구속사적인 차이를 분명히 의식하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와그너 등은 이런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의 잘못된 성령 운동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해서 그는 자신이 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성령운동을 훼방하는 세력을 ‘집단 종교의 영’이라 규정하고, 그 뒤에 마귀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종교의 영에 붙들린 지도자들이 하는 큰 실수가 지금 성령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들은 차라리 현상유지하기를 좋아한다”고 하고, “종교의 영이 그들에게 ‘두려움’의 주사를 놓았기 때문에 ... 그들은 권력(power)과 지배력(control), 돈(money)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두려움이고 ... 이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계절로 옮기기를 많은 지도자들이 싫어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와그너 등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주장을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는지가 잘 드러나는 레토릭(rhetoric)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하며, 일단의 사람들이 사도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에 대해서 1세기의 사도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그 사도들을 불러서 위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실까?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게 느끼듯이 이런 식으로 지속하는 것은 결국 사도와 종교적 천재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 민감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며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의 삶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그것에 반대할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좀더 유의해야 하고 기도에 힘써서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주께서는 이미 성경의 가르침과 내주 하시는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1세기의 사도들이 죽은 이후에 또 다른 사도들이 주어질 것이라는 시사를 성경은 우리에게 주도 있지 않다. 오히려 1세기의 사도와 선지자의 터 외의 다른 터를 닦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강한 경고가 성경에서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이런 사도적 가르침과 그것을 강조한 개혁 신학에 충실하여 이점을 강하게 주장하던 선생님들의 귀한 가르침이 굳건히 있었다.
예를 들어서, 정암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예언 역사는 사도의 역사처럼 계시 시대(사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직(單回職)에 속한다”고 하면서 “교회 시대에는, 예언의 후신으로서 설교가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예언들 가운데서 사실과 부합하는 것인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고 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사도와 그들의 가르침에 철저하려고 했던 개혁신학을 하려는 우리는 언제나 1세기의 시도들이 우리들의 사도들이며, 그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세워져 있음을 강조해야만 한다. 성경적 사도적 가르침에 다른 것을 더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바울의 선포(갈 1장)가 두렵지 아니한가? 성경에 있는 사도들 외에 사도가 있다고 말하며, 어떤 식으로라도 자신을 사도작인 것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이 무시무시한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도들과 선자지들의 사역이 그쳐진 후에 또한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아니한 이들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 시대에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서 이렇게 현저하게 벗어난 가르침들이 난무하며,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잇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영적인 어두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이 쓰여진 이유 중의 하나도 소위 예언을 한다는 이들 사이의 혼란이 너무 심각하여 그들을 위한 일종의 영적 규약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25), 이런 예언이 지속적으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런 책 등이 그런 영적 혼란을 더 부추길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오늘날의 혼란을 막고 영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성경이 말하는 사도적 가르침으로 동아 가는 일이다. 사도적 가르침에 의하면, 성경의 가르침에 무엇이라도 더 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도적 가르침에 자신들을 겸손히 복속시키는 일이다. 와그너와 이 책의 저자들에게, 또한 이런 책의 영향을 받는 이들에게 이런 비성경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굳건히 서 있기를 강하게 요청한다. 그것이 성경을 영감하여 주신 성령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길이며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복속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부디 바라기는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성경과 성령님의 가르침에 참으로 순복하여 주께서 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것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각주를 비롯한 본문은 필자의 저서 <우리 사회 속의 기독교> (서울: 나눔과 섬김, 2010)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많이 읽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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