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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인들의 덕성 요구를 높이 사면서
    우리사회와 기독교 2011. 5. 21. 23:24

    지난 봄 복음주의신학회에서 주제 강연을 하신  최승락 교수님의 “바울의 덕 사상과 덕 철학의 접점 찾기”에 대한 논찬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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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찬동과 감사의 말

     

    우리 사회 속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 특히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이 세상에서 외면당하는 문제를 보면서 이와 같은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울의 덕 사상을 제시하면서 20세기 말의 덕 철학(특히 Alasdair MacIntyre의 사상)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려고 하신 최승락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최 교수님의 문제 제기는 매우 날카롭습니다: “일반 사회의 정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통용되기도 한다.”(1) 더 나아가서, 최 교수님은 오늘 날 한국 교회는 “교회에 해가 되지 않는 한 일반 사회의 형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더 나쁜 경우는 세상적 악에 편승해서 살아간다.”고 매우 정확한 우리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기독교가 사회에 대하여 유익보다 해악을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14). 이런 우리의 상황은 21세기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 모두가 책임 의식을 가지고 깊이 있게 회개해야 할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변명하려고 하거나, 그래도 우리들은 그 보다는 조금은 더 낫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 엉터리임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는 길 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를 쓰고 그리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 어떤 가능성조차도 있지 않게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최 교수님은 일차적으로 바울의 글에서 “덕”이라는 말이 직접 나타나는 유일한 본문인 빌립보서 4:8을 검토하고, 그 말 자체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런 내용이 나타나는 것들을 잘 분석하며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바울의 ‘아레테’ 용어 사용의 근거를 70인경에서 찾으려고 하는 E. Lohmeyer와 W. Michaelis, 그리고 Otto Bauernfeind에 반하면서 “바울의 ‘아레테’ 용어 사용이 70인경에 근거하기보다는 당시의 통상적 용례에 근거한다”고 하시는데(4) 이는 매우 중요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바울이 스토아 사상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논의하신 것도(5) 귀한 공헌이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빌립보서 4:8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것들을 생각하라”라고 할 때 “이것들”(tauta)이 받는 것은 ... 좁게 보면 바로 앞의 두 가지, 곧 “덕”과 “기림”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더 좋은 것은 그 앞의 여섯 가지 항목과 “덕”과 “기림” 전체를 받는다고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정확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2). 또한 맥킨타이어 자신은 그렇게 까지는 가지 않으나 “덕과 전통의 뗄 수 없는 상관관계는 서로 다른 전통들이 강조하는 덕의 전형들을 증폭시키게 될 때 공동체 상대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다.”고 하시면서 리쳐드 롤티(Richard Rorty)를 언급하면서 비판하신 것은(12) 매우 중요한 기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뿐만이 아니라 “교회 밖, 공공의 영역까지도 우리의 사역의 현장이다.”(15)고 지적해 주신 것에 대해서 또한 “우리는 학문적 차원에서나 교회 공동체의 삶의 차원에서나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공 영역 속에서 우리의 공동체적 삶의 탁월성을 높이고 그 유익을 세상과 공유하는 길을 계속적으로 모색해가야 한다”(15)고 결론 내려주시는 것에 대해서 광장의 신학을 강조하는 사람으로서 머리 숙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논문은 가장 모범적인 구성을 가지고 현대 철학적 논의를 잘 이해하면서 그와 대화하려는 귀한 신학자의 노력을 보여 주는 좋은 모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 교수님의 논문 지도교수인 Anthony C. Thiselton의 글을 읽는 것과 같은 깊이와 넒이를 느끼면서도, 그 보다 훨씬 더 복음주의적 입장을 잘 드러내는 귀한 논문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2. 사소한 우려의 말

     

    그런데 바울의 덕에 대한 강조를 드러내면서 “복음주의 교회들은 지금까지 너무 은혜 사상에 집중하느라 덕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는 이야기”라고 고든 피(Gordon Fee)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때, 그것이 은혜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성화에 의해 나타나게 되는 덕성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도 그런 도전을 주기 위한 매우 수사적인 표현(rhetoric)이라면 좋겠으나 마치 은혜와 덕이 대립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까봐 걱정이 된다는 사소한 우려의 말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작년에 국내의 여러 학회들에서 논의했던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연관되면 여러 의혹이 증폭될 수 있기에 우려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톰 라이트의 최근 책을 언급하면서 믿은 후에는 덕으로 무장된 성격이 중요시된다는 그의 입장을 잘 제시하고 있는 데서(13-14) 이런 우려가 더 증폭될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최 교수님께서는 라이트를 잘 비판하고 계시기에 이점은 그저 우려일 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해석에서와 같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를 잘 강조하며 그 안에 있게 되면 아주 자연스럽게 성화의 길로 나아가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덕성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최 교수님의 의도일 것인 바, 이에 대해서 의혹의 눈길을 일으킬만한 표현이 나타나는 것이 강한 문제 제기를 위한 수사적 표현 이상의 것이 아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최 교수님의 의도와 일치한다는 것은 빌립보서 4:8을 논의하는 일종의 결론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일반적 덕이 무관심이나 배제의 영역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심과 추구의 영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3)라고 말씀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3. 논의

     

    그런데 같은 “덕”이라는 단어나 그것의 목록을 제시할 때에 이 세상에서 흔히 언급되는 단어들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같은 것일까 하는 근본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를 최종적 논의거리로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드러내게 되는 덕성들은 비슷한 용어로 표현된다고 해도 일반적인 덕의 목록에서 언급되는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불신자들 가운데서 덕스러운 자들이 나타내는 덕들과 특별 은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드러내는 덕성 사이에는 비슷한 단어와 성격에서 오는 일종의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더 분명히 해야 하지 않을까요? 소위 은혜를 강조하며 은혜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상식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수없이 자행하는 우리들의 상황 가운데서 나온 안타까운 고민이라는 것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 가운데 덕스러운 사람들이 드러내는 덕과 특별 은총 가운데서 성황의 결과로 나타나는 덕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qualitative difference)가 있다는 것을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 교수님께서도 잘 언급하고 계시듯이 “바울의 출발점은 덕이나 자연 자체의 승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사람, 새 창조”(6)이지 않습니까? 또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존재의 근원적 원천인 복음을 따라 살아야 한다”(7)고 최 교수님께서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죤 밀뱅크가 잘 지적하고 있는 대로 “덕의 개념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재생되기를 원한다면 그 내용뿐만 아니라 그 형식까지도 매킨타이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최 교수님께서는 “[바울이 말하는 덕들을] 단지 ‘특징적인 그리스도인 덕들’로만 국한시키는 실바(Moisés Silva)의 입장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논의하면서 “우리는 여기에 하나의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고 하면서 “바울은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교회의 안과 밖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6)고 하시는데 이것은 좀더 심각한 논의를 해야 할 주제라고 여겨집니다. 맥킨타이어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덕이란 단어는 그것이 사용되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더 본질적인 덕으로 간주되느냐 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연인이 말하고 추구하는 덕과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덕의 질적인 차이를 더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오히려 실바와 같이 해석해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이들이 드러내야 하는 덕들을 강조하는 바울의 의도에도 충실하게 되고, 불신자들의 덕들은 결국 “빛나는 악덕”(glittering vices, or splendid vices)이라고 주장했던 어거스틴의 의도에 부합하며, 최 교수님께서 잘 인용하고 있는 버밀리의 말의 의도와 부합하고, 칼빈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의도에 부합한 것일 아닐까 하는 논제를 최 교수님과 여러 신학자들에게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는 같은 문제 의식과 같은 노력을 경주 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미 있고, 열매 있는 논의를 위한 문제 제기로만 제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우리들은 같이 이 세상 속에서 진정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덕성을 드러내며,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 그런 덕 있는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형성을 위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살자고 하며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논문으로 우리들을 도전하시면 한국 교회를 일깨워 주시는 최 교수님의 귀한 논문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리면서 짧은 논찬의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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