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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직 신앙고백서 강해 (2)신학이야기 2011. 1. 28. 00:11
벨직 신앙 고백서 강해(2) :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관련해서도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에 대해서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시공간의 어느 한 점이나 한 영역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시공간을 전혀 초월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전혀 내재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초월만을 인정하여 내재성을 전혀 부인해 버리려는 20세기 초의 사상을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초절주의"(超絶主義)라고 번역하여 그 특징을 분명히 표현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초절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말하려는 내재주의(內在主義, immanentism)에 대한 좋은 반발과 반박이 되지만, 이 역시 한 극단으로만 치우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과 내재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과 관련한 무한성은 편재성(遍在性, 어디에나 계시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관련해서도 시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시간 안에 내재하시며, 시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시고(따라서,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시간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초월과 내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거나, 시간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조차도 상대화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오늘날 많은 잘못된 신학자들과 함께, 문자적 성육신은 모순이요 부조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바로 이해하는 이는,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동시에 시간 안에로 들어오실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벨직 신앙 고백서에서는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그저 그의 "무한성"이란 말에서만 시사되고 있으나, 공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충만히 채우시며, 오히려 모든 공간을 창조적으로 붙드시면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으시다고 가능성에 대한(per potentiam) 진술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질로(per essentiam) 어디에나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없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음을 잘 깨달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합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리이다"(시 139:10)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향하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는 이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있으신 분(God is in becoming을 강조하는 융엘 등), 아니면 적어도 변하실 수 있음을 한 측면으로 가지신 분으로 생각하려는 것(과정신학 등)이 오늘날의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질상 전혀 변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아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없으시다 거나, 아주 답답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은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을 따라서, 말라기 3:6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에 야고보서 1:17의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시를 믿을 만하게 하는 것이 그의 불변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하시는 일에서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라기 3:6의 진정한 의미도 이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역지 아니하시므로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온전히 소멸하지 않고 언약의 상속자가 되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 변하시지 않으신다는 특성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의 불변성은 후의 언약의 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이 영원히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변하지 않고 당신님의 존재를 유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지 않은 존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이 변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능성은 우리가 후에 생각할 창조와 역사를 그 목적에로 까지 인도하여 가시는 통치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바른 위치에 잇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기도에 열심인 것도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어, 그 전능성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실 때에도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영혼의 무릎을 끊고서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의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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