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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사역자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우리사회와 기독교 2022. 7. 27. 07:57

     사모님들을 위한 잡지인 라일락48 (2022년 여름호):16-21에 실린 글을 여기에도 올려서 다같이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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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삶이 어떤 정황 속에 있는지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성찰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정신없이 바쁠 때 이런 자아 성찰(self-examination)을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또 어느 큰 위기 속에서 정신없어지면 역시 자아성찰 없이 문제 해결에 몰두하여 정상적인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된다. 코로나 19와 같은 커다란 사건 속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자신들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며, 사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모든 정황에서 늘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아성찰의 기준과 대상

     

    자아성찰의 대상이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은 이 말속에 자명하게 들어 있다. 우리들은 항상 자신들을 살펴야 한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그데 이것이 어렵다는 것은 이 세상도 잘 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늘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을 살피기 좋아한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보고 영화를 보고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자아성찰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일인데, 다들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성찰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대개는 사람들과 사회가 특정 시기에 만들어 놓은 통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자신들을 판단하려고 한다. 그래서 당대에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이 괜찮다고 하기도 하고 문제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1:14) 것과 같다. 그것을 결국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다 헛된 것이다. 우리들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는 말씀에 의지해서,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명령인 성경에서 하시는 것만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가장 멸시받는 것이 바로 이런 태도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이런 상대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던적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을 분명히 천명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정신없음이 드러난 예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서 조금이라도 자신들을 돌아보면 우리들의 문제가 잘 드러난다. 그렇게 드러난 문제 중 어떤 것은 매우 심각한 죄이다. 아마 코로나19 정황 속에서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려”(10:25) 한 죄일 것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큰지 우리들은 이것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코로나19 한 가운데서 어떤 기독교 지도자의 입에서 우리들이 같이 모이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와 같은 말도 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말씀의 의도를 잘 들어야 한다. 모이기만 하고 주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도무지 주의하지 않으면 함께 모이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지만, 잘못 들으면 우리들이 모이지 않아도 별 문제는 없다는 의미가 이 세상에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 것이 문제이다. 이 세상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고, 이 세상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는 매우 온순한 교회가 된 것 그것이 문제다.

     

    그렇게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로 요즈음 널리 유행하는 뉴 노말”(new normal)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정신없이 그대로 따라 쓰는 이런 것에서 우리들의 정신없음이 잘 드러난다. 이 세상은 코로나19 이전 상황을 정상”(normal)이라고 하고, 코로나 19로 인해서 사람들과 접촉을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고 마스크 쓰고 하는 등의 일을 비정상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코로나 19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전염병들이 계속해서 창궐할 것이니 이것을 새로운 정상”(new normal)으로 여기며 이런 새로운 정상, 뉴 노말에 부합하게 모든 것을 새로 정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상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사람들도 이렇게 이 세상의 말버릇을 그대로 따라 가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안에도 온라인 예배를 하는 것이 뉴 노말이고, 이런 뉴 노말상황에 부합하게 교회와 관련한 여러 일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그런 것을 우리에게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라고 해야 하는가 말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이전에도 타락한 이 세상은 비정상적인(abnormal) 세상이라고 했었다.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구속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와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제 정상(normal)을 회복한 것이라고 했었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랬지만,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네덜란드에서 진정한 기독교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이를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코로나19 이전 상황이 정상”(normal)인 것처럼 표현하는 그런 표현,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유행하듯이 쓰는 말을 조금 더 생각하기만 해도 적어도 기독교계 내에서는 이런 말의 유행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별하지 않고 그저 이 세상에서 유행하는 말을 그대로 가져와 쓰는 일은 곳곳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정신없음을 잘 표현하는 증상이다. 너무 바쁠 때 또는 너무 황당한 일 앞에서 우리들은 잠시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이는 진짜 정신이 나갔다는 말이 아니고 그저 일상 언어로 생각없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때에 쓰는 말이다. 이를 테면, 어떤 유대화주의자들이(Judaisers) 자신들이 그리스도인라고 말할 때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고후 11:23)고 말한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도 너무 바쁘거나 급하면 정신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곤 한다. 그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데 자아성찰은 이런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그런 것들이 정신없이 한 생각, , 행동이라는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정한 자아성찰은 회개를 낳는다. 우리를 돌아보면서 문젯거리, 우리의 정신없음을 찾아내어 하나님 앞에 아뢰고, 고침을 받아야 한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문제와 상황에서 자신을 고집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심각한 죄악이다.

     

               회복을 위한 주님의 권면

     

    그러므로 이 시기는 아마도 다음 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할 시기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2-14).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주께서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니,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비정상적 상황 속에 있었다는 것을 잘 인정하면서 주께서 회복해 주시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들의 영적인 문제를 물리적으로 표현하여 우리가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게 표현하였다. 우리는 피곤하고, 바로 가지 못하고, 절고 어그러진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코로나 19 이후 우리의 상태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가 아닌가? 피곤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는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영적 상태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실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니, 이 말씀 속에는 주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시겠다는 함의가 이미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정상적 상태를 인정하고 주께서 우리를 참으로 온전하게 해 주시도록 주님의 손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스스로 피곤치 않으려고 하고, 우리 스스로 쓰로가 설정한 바른 길로 가려고 하고, 우리가 절지 않으려고 하면, 오히려 잘못된 것들이 더 늘어난다. 바른 것에 대한 기준도 다 주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하고, 주께서 하라고 하는 것만 성령님께 의존해서 하려고 하면 된다. 이런 것을 옛 사람들이 영적인 선”(spiritual goodness)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영적 선으로 가득차야 한다. 스스로는 매우 피동적이나 주께서 하라고 한 것을 이루려 함에서는 가장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the prescriptive will of God) 전체이나 우선 그 다음 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고 명령한다. 이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화평함과 거룩함이 있지 않다. 믿기 전에도 그랬고, 주님을 믿은 후에도 이런 것들은 우리 스스로 보유하고 있는 자신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주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서 주시는 화평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지고 추구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님께서만 거룩하시니 삼위일체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유지할 때만 거룩함, 즉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의 구별, 옛 사람들이 즐겨 표현하던 성별(聖別), 거룩하게 구별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을 믿기 전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믿은 후에도 우리 스스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코로나 19나 감기나 다른 전염병처럼 나쁜 의미의 전염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마땅히 발생해야하는 좋은 의미의 전염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관된 우리들이 그 좋은 의미의 전염의 대상자가 된 것이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서 진정 그리스도와 생명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좋은 의미의 전염의 대상자가 되어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 가운데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이 되어 그에 합당한 교회를 이루고 그런 사회를 향해 전진하는 것 - 이것이 코로나 19 이후에서 전염의 의미를 잘 알게 된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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