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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해서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우리사회와 기독교 2016. 8. 6. 19:54
<기독교 사상> 2016년 8월호 특집이 "동성애, 성서, 경험"인데 그와 관련된 6편의 글 가운데서 동성애에 반대하는 글이 이 글 하나였습니다. 12-19. 안타까와 하면서 여기 실린 글을 올립니다.
동성애에 대해서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동성애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날 동성애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 난무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먼저 사랑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분명히 하고,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랑에 대한 성경적 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원리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실 계획을 가지시고, 먼저 남자를 만드신 후에(창 2:7), 사람의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 자신이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즉,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를 지으시리라고 말씀하시고(창 2:18), 남자로 하여금 자신이 혼자이며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심리적 필요를 느끼게 하신 뒤에(창 2:19-20), 여자를 만드셔서 그 둘이 한 몸을 이루고 살게 하셨다(창 2:24). 여기에 사랑과 혼인의 시작이 있다. 사랑은 모든 면에서의 하나됨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정서이다. 영적, 정신적, 인격적, 신체적 하나됨에서 사랑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됨을 위해서는 사랑이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결국 하나님을 중간 언어로 하는 사랑이다. 두 사람이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이를 더욱 사랑하게 될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의도하신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대립될 때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결국 상대편을 세워주는(up-building) 것이어야 한다. 결국은 상대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성경적 원칙에 따라 살펴 본 동성애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생각해 볼 때 성경이 이성애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나타내고 있는지는 아주 분명해진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대립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내신 창조의 원리에 따라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둘이 한 몸이 되어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그리하여 온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릴 것을 원하셨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고, 정상적인 가장의 모습이고, 그럴 때에야 이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남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천사들과 “상관하리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죄악상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는 창세기 19:5, 7, 9을 볼 때, 그리고 구약적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함이니라”(레 18:22)고 강하게 말하며, 이런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신 것을 볼 때(레 20:13),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신 22:5)고까지 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가나난 족속들과 이스라엘 중의 동성애적 행위를[남색, 男色] 비난하면서 말하는 것을 볼 때(왕상 14:24, 15:12, 22:46), 구약 성경이 동성애적 행위와 이를 유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정죄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가나안 족속들과 이스라엘 중의 동성애적 행위를[남색, 男色] 비난하면서 말하는 것을 볼 때, 구약 성경이 동성애적 행위와 이를 유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정죄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어서, 르호보암은 솔로몬이 암몬 여인 ‘나아마’를 취하여 얻은 자녀로 르호보암이 즉위한 후에 이전에 가나안 백성들이 행하던 가증한 일이 유다 땅에 성행하게 되었다. 즉, (1) 우상을 세워 섬기는 일이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많았고, (2)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게 된 것이다(왕상 14:21-24). 이 때 “남색하는 자”(שׁ??)라는 말은 제의적 창기들(the cult prostitutes)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들 본다. 이방 종교적인 행위가 정죄된 것이지만 여기서 동성애적 관계도 함께 정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후로 유대와 이스라엘 왕 들 가운데 이런 자들을 없애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이들로 언급된다. 예를 들어서, 아사에 대해서는 그가 그 아버지 아비얌과는 달리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왕상 15:11) 하면서(1) 남색하는 자들을(םי????) 그 땅에서 쫓아내고(12절), (2)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12절), (3) 또 그 모친(실질적으로는 할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다고 묘사한다(13절).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에 대해서도 그가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왕상 22:43)고 하면서, 그의 사역으로 남아 있던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낸 것을 언급하고 있다(46절).
또한 요시아 때에는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에 따라 개혁하는 중에 “여호와의 전 가운데 미동의 집을 헐었다”고 말한다(왕하 23:7). 여기서 “미동의 집”이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이곳은(םי???? י??), 영왕기상의 번역을 따라 하자면 남색하는 자들의 집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곳은 성전 안에서 제의적 창기 활동을 위해 확보된 곳으로 이해된다. 요시아 개혁 이전에 이런 미동의 집이 성전 안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종교가 얼마나 가나안 종교와 깊숙이 연관되어 갔는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시대의 대세에 밀려가 심지어 종교까지도 시대의 대세와 합류해 버리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요시아가 율법에 따라 종교 개혁을 하면서 타파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때에는 남색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그 땅에 남색하는 일이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언약 백성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주변에서 동성애가 성행하는 상황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에 따라가지 말고 그들과는 구별된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살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잘 모르는 어떤 이상한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자주 목도 하는 일이었고, 바로 그런 것을 엄격히 피하라고 구약 성경은 언약 백성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더 분명히 동성애적 행위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천명하고(롬 1:26), 창조주의 의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선언한다(롬 1:25f.). 또한 바울은 이 세상의 현저한 악들을 열거하는 중에 동성애적 행위를 포함시켜 언급하고 있다(고전 6:9f., 딤전 1:9f.).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간주하시며, 가증한 것으로 여기셔서 아주 분명하게 비난하시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의하면 동성애만이 죄악인 것은 아니고, ‘정상적인 혼인 관계 밖에서의 모든 성 관계’가 다 죄악된 것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애만을 정죄하고, 그런 이들이 특별히 더 잘못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동성애의 죄도 다른 모든 성적인 죄와 같이 심각한 죄이고, 하나님에게서 정죄받을 죄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도 다른 죄인들과 같은 죄인들이지, 그들이 더 심각한 죄인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죄는 그 어떤 형태를 진 것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다 심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애를 비롯해서 모든 잘못된 사랑의 표현이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바른 사랑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들 중의 하나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고귀한 것들은 타락하면 가장 추악한 것이 된다.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최악의 것이 되는 것이다. 사탄과 뱀을 생각해 보라. 사탄은 하나님이 지은신 천사가 타락한 존재가 아닌가? 또한 뱀은 여호와께서 지으신 들짐승 가운데 가장 똑똑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것이기에 사탄이 가장 잘 이용한 것이다. 또한 인간의 이성을 생각해 보라. 고귀한 기능을 담당하게끔 창조된 이성이 오용될 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게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하게 창조해 주신 것일수록 타락하면 더 흉악하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능력의 하나인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께서 내신 원리에 따라 행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
사랑은 우리 존재 전체에 대한 요구이며, 존재 전체를 던져 넣는 것이다. 그것은 격정이며, 존재 전체의 갈망이고, 실존의 진정한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아가서에서는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치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아가 8:6, 7). 이런 사랑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서도 살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이다(아가 8:7).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고귀한 것을 참으로 고귀하게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을 내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말이다. 그런 사랑은 이 세상의 진정한 아름다움[美]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세상에서 너무나도 드문 것 같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가운데서만 우리는 이런 사랑 가운데서 “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저 안에 있다”는 말의 깊은 뜻을 맛보고, 누리며 살아 갈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랑, 주께서 말씀하셔서 이 세상에 창조해 내신 그런 사랑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안에서,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차별 금지법에 대하여
문제는 벌써 수년 전부터 여러 차례 제안되고 있는, 그리나 이직은 국회를 통과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제정되어 있지 않은 차별 금지법에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차별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함께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슬며시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즉, 어떤 사람이 이성애적 성향을 지니고 있든지, 동성애적 정향을 지니고 있든지, 양성애적 성향을 지니고 있든지 그것에 근거해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에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동성애자라고 해서 사회가 어떤 사람을 왕따 시키든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의 주장이 아니다. 만일에 그 정도의 함의만을 지닌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왕따 시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동성애자라고 해서 회사에서 해고하거나 그의 능력과 상관없이 다른 일을 하게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라면 오히려 우리가 더 그들을 보호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적 지향에 다른 차별을 일체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포함된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면, 우리는 결국 동성애도 정상적인 성적인 정향의 하나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기에 문제가 된다. 그리되면, 결과적으로 학교에서도 동성애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가르쳐서도 안 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결혼식장이나 예배당에서 동성애 커플의 혼인식을 그곳에서 행하지 못하게 하면 이 차별법을 어긴 것으로 하여 법이 정한 처벌을 받아야 된다. 이런 법을 지닌 미국의 몇몇 주의 경우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인간적으로 그 분들을 존중해도 그분들이 동성 결혼을 한다고 하면서 축하 케익을 주문했을 때 그것을 거절하였을 때, 자신들이 차별 받았다고 고소하면 역시 법이 정한 처벌을 받게 된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 법에 통과된 다음에는 동성애가 성경에 의하면 죄악이라고 설교한 경우에 그 설교를 듣고 어떤 사람이 차별을 받았다고 신고하면 그 설교자도 법에 의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고소하고 신고하는 일이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교회가 어떤 메시지를 할 수 있는가도 이 세상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되는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국가의 왕이나 귀족들이나 잘못된 교회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교회가 설교하기 원하고, 자신들이 원치 않는 바를 설교하는 설교자와 그런 교회를 핍박하였다면, 이제는 이 세상의 여론과 이 세상의 법이 교회가 과연 무엇을 선언하야 하는가 하는 것을 규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이것이 자주 제안 되는 차별 금지법과 여러 시도의 학생인권조례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진다. 이 세상이 교회로 하여금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말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금 제안되는 차별 금지법은 동성애에 대한 법적 보호를 제공하여,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상적인 성적 지향성이며, 이를 시행해도 좋다는 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이런 법이 있지 않은 지금도 우리나라에 청소년들에게서도 에이즈가 많아진 것이 상당 부분 동성애 때문이라는 객관적 자료를 가지고도 그것을 발표하지 않거나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는 문화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이 법이 통과되었을 때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는 식의 많은 역차별이 나타날 것은 아주 명약관화한 것이다.
셋째로 결과적으로 이 사회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분위기로 나아가는 심각한 문제가 더 노골적으로 노출시키는 결과가 이 법의 제정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후에는 소아성애(小兒性愛)도 용인(容認)하자고 하며, 수간(獸姦)도 용인하지고 하는 등의 문제가 점차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일반은총에 저항하는 이와 같은 인간의 저항은 지속될 것이고, 그리하여 결국 이 사회가 유지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 금지가 흔히 생각하는 것, 즉 “소수의 동성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하주라”는 것 정도의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널리 알려야만 한다. 그와 동시에 이 시점에서 우리가 힘써야 할 세 가지 일을 제시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선 군대내의 동성애자들을 처벌하고, 동성애를 불법적인 것으로 정하고 있는 군형법 92조 6항이 헌법에 합치한다는 결정을 헌법 재판소가 내린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같은 입장을 분명히 하도록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여러 노력을 해야 한다.
둘째, 이제 20대 국회에서 다시 제안될 차별 금지법에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지 않도록 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고, 문제점을 알리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이 시대의 잘못된 정신을 따라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뜻이 우리 교회를 지배하여, 교회 공동체와 관련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동성애를 비롯한 모든 성적인 죄를 타락한 인간이 죄가 나타나는 양상들로 여기고, 그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우리들 가운데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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