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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직신학과 기독교 교육학
    신학이야기 2015. 11. 25. 23:25

    오래 전에 써서 안양대학교 기독교 교육과 학술 심포지움에서 발제했었고, 한국성경신학회가 내는 <교회와 문화> 34 (2015년 3월): 135-59에 발표했던 글을 고상섭 목사님께서 널리 읽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셔서 여기 올려 봅니다. 각주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교화와 문화> 34 (2015년 3월): 135-59를 참고하기 바라면 여기 본문만 올려봅니다. 유익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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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과 기독교 교육학

     

     

    조직신학과 기독교 교육학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교육의 토대(기초, foundation)의 하나로서 신학 일반의 한 부분으로 조직신학을 이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독교 교육의 내용으로서의 조직신학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는 기독교 교육의 토대와 전반적 우산을 제공하는 것이며, 후자는 구체적 교육 내용 중 상당한 부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점을 하나 하나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 일에 앞서 먼저 조직신학과 기독교 교육학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규정해 보기로 한다.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하나님과 그의 경륜을 연구하는 신학 중에서 성경과 역사의 과정에서 배운 모든 것을 가지고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체계적 설명을 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학문 분과이다. 정통주의 입장에서 이는 성경적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권위를 가지고 선언한 교의(敎義, dogma)를 잘 설명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교의학(Dogmatics)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 교육(Christian Education)은 교육 사태 전반에 대해서 기독교적 입장에서의 접근을 하는 것이고, 이런 교육 사태 전반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의 학문이 기독교 교육학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좁은 의미의 종교 교육만을 기독교 교육이라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1. 기독교 교육의 토대의 하나와 전체적 우산으로서의 조직신학

     

    오래 전에 교육학이 학문으로 제시되기 시작했을 때 헤르바르트(J. F. Herbart, 1776-1841)는 교육학은 철학과 심리학의 토대 위에 있는 학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때 철학아라는 용어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교육 사태 전반에 대해서 기독교적 접근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기독교 교육적 입장에서는 신학이 모든 것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되고, 그에 토대하여 철학과 심리학 등이 교육학의 기초 학문으로 여겨지는 구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적 접근에서 모든 것이 그 위에 서야 하는 신학적 토대가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작업은 기독교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모든 것은 성경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신학의 요구의 하나이기도 하고, 전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교육적 입장을 기독교 유신론적 교육학(Christian-theistic education) 또는 전제주의적 교육(presuppositional approach to Education)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적 입장에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성문화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야 만하고, 그에 근거해 우리의 아직 의식되지 않는 기독교 세계관[나의 이른바 암묵리의 세계관]이 있고, 이를 외현해 낸 작업인 의식된 기독교 세계관이 있고 이는 비전문가가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소위 세계관적인 신학이 된다. 그 위에 학문적인 신학이 있고, 그 한 부분이면서 그 모든 신학을 제시하는 조직신학이 토대(기초)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위에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기초 과학들이 있어서 우리들의 교육신학, 교육 철학이 수립 되고, 이에 근거한 교육학의 구체적인 것들이 있게 되면, 이에 근거한 우리들의 교육활동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 우리들의 다양한 교육적 활동들 |

    [교육학=기독교 교육학]

    [(기독교) 교육 철학]

    [(기독교) 교육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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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토대 학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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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일반의 한 부분인 조직신학]

    [외현화된 기독교 세계관=세계관적 신학]

    [아직 의식되지 않은 암묵리의 기독교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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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의 근원적 인식적 토대로서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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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의 근원적 존재적 토대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이상에서 우리는 신학이 어떻게 기독교 교육의 토대가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했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각 학문 분과는 서로가 서로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후에 기독교 교육이 조직신학에 어떻게 도움이 줄 수 있는 지도 생각할 바와 같이, 기독교 교육학이 신학의 토대 역할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신학의 토대 위에 기독교 교육학이 정립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게시를 성문화한 성경에 토대를 두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의 모든 작업의 인식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들은 모든 교육적 작업이 마쳐졌을 때 그 전체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틀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 역시 신학이 아닐 수 없다. 신학 가운데서 모든 신학의 내용을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조직신학이 전반적인 우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우산은 교육학을 포함한 다른 학문들이 제공한 통찰을 통해 더 분명해지고 더 포괄적인 것이 된 우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토대에 대해서 언급한 위의 내용을 포함하여 우리의 작업 전반을 구성적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은 틀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그의 어떠하심과 그의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것의 존재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근원적 존재이고, 필연적 존재이다. 그는 없을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있을 수 있고, 그 기반 위에 계시도 있고, 이 계시를 연구하는 신학도 있고, 계시의 빛에서 일반 계시를 연구하는 학문도 있고, 기독교 교육도 있는 것이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 [종국적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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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학의 완성

    3. 교육철학의 완성

    4.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교육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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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리들의 다양한 교육 활동들 | [교육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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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교육학=기독교 교육학]

    , 교육 역사의 이해, 교육 과정, 교육 심리, 교육 행정, 교육 공학, 교과 교육 등

    [7. 교육철학]

    [8. 교육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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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토대 학문들 [토대 학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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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신학 일반의 한 부분인 조직신학] [신학적 토대]

    [11. 외현화된 기독교 세계관=세계관적 신학]

    [12. 아직 의식되지 않은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적 토대]

    [13. 모든 것의 근원적 인식적 토대로서의 성경] [근원적 인식적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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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삼위일체 하나님] [근원적 존재적 토대]

     

    이 가운데 141은 정확히 같은 것이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을 인정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102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나 사실 계속해서 순환적(循環的)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2는 이 모든 작업을 통해서 훨씬 더 풍성해진 신학이기에 신학의 완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단선적이지 않고, 계속해 순환하여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바르게 인정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73도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데 계속 선순환(善循環)하여 더 나은 교육 철학이 제시되고, 더 온전한 교육학을 형성하여 나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나는 가장 이상적 상황에서의 교육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교육적 활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했고[그러므로 제대로 된 교육은 기독교 교육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위한 학문적 작업을 교육학이라고 했으며[그러므로 이상적 교육학은 기독교 교육학이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한 여러 토대 학문들이 근거하는 신학의 한 부분으로 조직신학을 제시하고, 그것은 다시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고, 그것은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이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근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육학을 통해서도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말씀을 다시 확인하게 되고, 그러므로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이라고 바울과 함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세상에서 교육과 이를 말하는 교육학에서는 전혀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교육 논의에서 하나님과 성경과 신학적 근거를 하나하나 제거해 가는 작업을 해 왔다. 그러므로 교육학과 관련해서도 참으로 반립적인(anti-thetical) 두 학문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여러 교육 가운데 종교적 영역의 교육을 하는 종교 교육(religious education)을 기독교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종교 교육도 이런 일반적 의미의 종교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진정 기독교적 의미에서 종교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반립(反立)이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자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독교 교육이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영역에 대한 교육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 사태 전반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교육(Christian education)이다.

     

    2. 조직신학이 제공하는 토대 마련의 예

     

    조직신학이 기독교 교육의 토대로서 기능할 것이 여러 가지이지만 지면상 두 가지 예만을 들어서 바로 이런 면에서 조직신학이 기독교 교육의 토대를 마련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또 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 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 예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조직신학이 기독교 교육의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 예는 하나님 형상개념과 그 의미이다. 이것이 과연 어떤 것이지를 생각할 때 조직신학이 기독교 교육의 하나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 매우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오직 사람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좋은 조직신학이 잘 밝혀 주는 바와 같이 이는 사람의 어떠함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앞으로 어떠하게 되어가야 한다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은 창조될 때에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또한 하나님의 형상답게 그 형상을 구현해 가야 하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이 때 형상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함(mirroring)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함을 받았고, 여기에 하나님 형상의 이미”(already)가 있고, 이 형상 개념의 동사적 의미와 함께 하는 명사적 의미가 있다. 그런 뜻에서 창조된 사람은, 오직 그/그녀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추구하고 그것을 피조물의 수준에서나마 반영해 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 동사적 의미의 하나님 형상의 의미와 형상의 아직 아니”(not yet)적 측면에 대한 이해가 나타난다.

     

    더구나 인간은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을 저버리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 개혁신학에 말한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 원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를 상실하고,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도 다 찌그러뜨렸다(“깨뜨렸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것도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상당히 왜곡된 방영을 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반영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이기는 하지만 모든 점에서 왜곡된 반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곡되었어도 하나님의 형상이니 그/그녀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참 형상으로 오셔서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우리의 형벌을 다 감당하시고[그리스도 사역의 소극적 의미], 이제 우리들이 다시금 하나님의 향상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그리스도 사역의 적극적 의미]. 그리하여 십자가의 구속 사역과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 전체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죄와 타락으로 인한 형상의 왜곡을 청산하고 원칙적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시작하는 일인 중생이 있게 되고, 이제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아 가는 평생에 걸친 성황의 과정이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교육의 가장 가까운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중생하고 성화하여 그 성화가 몸을 포함하여 완성되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영화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이루어지고, 그와 함께 온 피조계도 온전히 새롭게 되면 종국적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활동의 종국적 목적이니, 따라서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최종적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개념과 관련하여 기독교 교육은 인간의 죄와 타락과 자범죄로 다 왜곡시켜 버린 (그러나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이긴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 그러므로 왜곡된 형상[distorted image]) 사람을 다시 온전한 의미로 하나님을 반영하기 시작하도록 하시는 일인 중생과 그 과정인 성화와 그것을 종국적 완성인 영화가 기독교 교육의 가까운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하여[기독교 교육의 종국적 목적]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키고 있는 왜곡된 형상인 타락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반영하게 만들어[중생: 기독교 교육의 가까운 목적 1] 이 땅 가운데서 계속하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반영하도록 잘 가르쳐 복종하게 하여[성화: 기독교 교육의 가까운 목적 2], 죽은 후에 온전하게 된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heaven)에서 온전한 기쁨을 누리며 안식하고 있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때에(19:28) 부활하여 그 몸도 온정하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반영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됨의 완성을 경험하고 영원히 그런 삶을 계속하게 하려는 것이다[영화: 기독교 교육의 종국적 목적]. 다시 정리하면, 중생과 성황와 영화를 목적으로 교육적 활동을 하는 기독교 교육은 따라서 인간들이 하는 일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혼자의 힘으로 하시는”(monergistic, 神獨力主義的) 사역(educatio dei)인 것이다. 이 일에 부모와 목사와 교사등과 같은 인간 교육자들을 주께서 사용하시니 우리들을 기쁨으로 이 일에 동참하여 섬기는[隨從드는] 것이다.

     

    좋은 조직신학이 잘 밝혀 준 개념을 따라서 기독교 교육을 생각할 때 우리의 개념이나 교육 행위에서의 왜곡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에 교육을 신인협력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든지, 더 나아가 인간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런 왜곡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깊이 생각하면 기독교 교육의 좋은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좋은 예가 은혜 언약 개념이다. 행위 언약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 언약이 창세기 3:15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이 다시금 하나님과 언약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 비록 타락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이 땅에서도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심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언약 백성으로 서의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땅에서 과연 어떻게 언약 백성으로 살 것인지를 배우고 실현해 가야 한다. 그러므로 의식을 가지고 믿는 성인(成人)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언약 개념은 기독교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된다. 바른 교육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생으로 자신이 언약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변개(變改, 回心, conversion)이 일어난다면, 최초의 회개와 믿음으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변개는 언약 백성됨의 의식적인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되는 회개와 믿음으로서의 성화는 기독교 교육의 중요한 과정이고, 이는 영적 성장과 동일한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은 어떤 위치에 있게 되는가? 은혜 언약 개념을 철저히 가지지 않는 침례교에서는 이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답을 내어 놓지 못한다. 오히려 언약 개념을 따라 논의하면서 오히려 자녀들은 은혜 언약 안에 있으니 당연히 유아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논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입장을 지닌 분들은 신약에 명확히 유아 세레를 베풀라는 명령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새 언약 백성을 표하는 새로운 의식(a new rite)이라고 주장한다. 요즈음 언약 신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유아 세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침례교 신학자들의 논의가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 신학에 충실하게 성경을 주해할 때 선하고 필연적인 추론에 의해서 신약에서도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로 여겨야 하며, 이런 언약 신학은 반드시 유아세례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언약 신학을 잘 드러내신 분들은, 신약 성경에 자녀들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라는 명시적인 말씀은 없어도 은혜 언약의 토일성에 근거해서 유아 세례를 바라 본 것이다. , 새 언약 시대에도 옛 언약에서 그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들로 인정하고 그 자녀들에게 언약 안에 있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표로 할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베풀었던 것과 같이 동일한 은혜 언약에 속해 있는 신약 시대의 언약 백성의 자녀들에게도 언약의 표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언약 신학에 근거하여 설명하면 유아 세례는 기독교 교육의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부모와 교회는 교회의 언약의 자녀들을 믿음과 주의 교양으로 훈련시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약 신학을 가지고 있는 교회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언약 신학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 개념이 우리의 교회와 개인의 삶을 주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되는 지를 언약 신학과 유아세례, 그리고 이에 근거한 교육을 잘 강조하던 루이스 벌코프가 1930-50년대 초의 미국 교회를 생각하면서 하고 있는 다음 같은 말을 생각해 보라:

     

    미국 교계에 언약 교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 심지어 언약 신학의 교리들을 이론적으로 시인하는 교회들에서도 이 교리는 대개의 백성들의 의식과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더구나 그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일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다.

     

    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가? 그러나 아주 큰 열심이 있었다고 하는 지난 20-30년의 한국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 중에서 더 열심을 내었다고 하는 한국 장로교회의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언약 백성의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열심 잇는 교회도 형식적으로만 언약 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언약 교리를 형식적으로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기독교 교육의 토대가 될 수 없게 할 것이지만, 정신을 차린 우리 시대의 언약도들은 유아 세례를 기독교 교육의 큰 토대로 여길 것이며, 언약의 자녀들을 가정과 교회에서 잘 키우기 위해 기독교 학교가 필요하다는 의식도 가지고 이를 위한 헌신도 하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두 가지 예를 들어서 조직신학이 기독교 교육의 좋은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에 대한 조직신학의 기여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좋은 조직신학자들 가운데 능력이 넘치는 분들은 교육에 대해 매우 통찰력 있는 작업을 해 준 일도 있다. 헤르만 바빙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다시피 코넬리우스 야스마는 헤르만 바빙크의 교육 사상을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을 정도이다. 이는 능력이 넘치는 사상가들이 우리들의 교육적 실천에도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런 토대를 제공하는 것 외에 교육 내용으로서의 조직신학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3. 교육 내용으로서의 조직신학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반영하는 진정한 사람을 드러내도록 하려는 기독교 교육의 내용을 다양하고 무수히 많다. 기본적으로 (1) 직접적으로나 암묵리에 성경이 가르쳐 져야 하고, (2) 그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사상이 가르쳐져야 하고, (3) 성경의 빛에서 일반 계시의 내용이 바르게 해석되어 가르쳐져야 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스스로 성경의 빛에서 일반 계시의 내용을 바르게 해석해 나갈 수 있는 안목이 있는 사람, 즉 의식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빛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야 한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제대로 가지고 표출하며, 의지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열심히 수행해 가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조직신학은 기본적인 기독교 사상으로 직접적으로 그리고 또한 암묵리에 가르쳐져야 할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성경으로부터 기원한 기독교 사상을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하고 변증하는 작업이 조직신학이라면, 그것을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을 교리라고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교회의 공식적 교리를 설명하고 변증하는 작업이라는 뜻에서 교의학(Dogmatics)라고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바르고 정통적인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결국 교회가 공식적으로 믿고 있는 바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종국적으로는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리는 결국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바른 교리와 좋은 조직신학은 성경적인 교리요 성경으로부터 나온 성경적 신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같이 가는 것이고,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그것으로부터 교리를 이끌어 내고, 적용을 이끌어 내는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면서 기독교 교육을 할 수도 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분들이 청교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느 본문이든지 기본적으로 성경의 자연스러운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잘 설명한 후에 그 본문으로부터 이끌어져 나올 수 있는 교리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자세히 설명 한 후에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는 식으로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과거에 신실하게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신 분들도 결국은 그 교리가 이끌어져 나온 성경 본문을 설명하고 밝혀 나가며 설득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결국 성경을 설명해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신실한 분들에 의해서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대립적으로 의식되지 않았다.

     

    이런 뜻에서는 조직신학의 기본적인 틀과 내용이 그 대로 기독교 교육의 좋은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요리 문답을 가르치는 것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것은 아주 좋은 교육 내용을 풍성하게 가지고서 가르치기를 시작하는 것이 된다. 이는 결국 잘 요약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1) 각각의 내용의 성경적 근거를 잘 제시하면서 바르게 주해된 성경해석의 빛에서 그 내용을 그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해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을 때 요리 문답의 내용을 알면서도 두무지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성경과는 다른 메마른 교리의 내용을 배운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기 쉬운 것이다. 또한 그렇게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하는 내용을 (2) 교육 대상자들에게 부합하게 그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4. 오늘날 조직신학의 동향과 관련한 기독교 교육학의 역할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경륜을 연구하는 신학 중에서 성경과 역사의 과정에서 배운 모든 것을 가지고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체계적 정리를 하는 작업인 하위 분과가 조직신학이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항상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성경적이어야만 한다. 신학의 다른 분과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조직신학은 항상 성경적이었고, 성경 주해에 근거한 것이었고, 지금도 그러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조직신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학자들의 주해적 논의들을 항상 관심 있게 관찰해야 한다. 또한 현재와 과거의 주해적 논의와 그 적용 가운데서 참으로 성경에 일치한 것을 찾아내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성경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의 공동 노력은 바르고 건강한 교회 안에 늘 있던 현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조직신학 연구에 있어서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만 논의가 되지 않고, 매우 다양한 입장에서의 다양한 신학적 논의들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을 우려할만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오늘날의 신학적 방향과 그 논의 결과들은 너무나도 다양하여 그 누구도 누가 어떤 논의를 하는지 다 알고 있지 못하다고 할 정도이다.

     

    4-1. 조직신학의 근자의 관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라면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첫째로, 20세기 초반에 (18-19세기에 상당히 간과되고 심지어 부인되었던) 삼위일체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모든 신학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삼위일체론자들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다시 연구하며 성경에 근거해서 그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전통적 삼위일체론 변화시켜 나가는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부끄러워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19세기에는 삼위일체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거의 다 정통주의자들이나 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지만, 오늘날은 삼위일체론도 다양하게 제시되어 모든 삼위일체론자들이 다 정통주의적이지 않게 매우 복잡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다양한 삼위일체 신학들이 경쟁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들의 특성을 살피면서 과연 성경에 충실한 삼위일체론을 찾고 발전시키는 일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

     

    또한 현대의 위기와 함께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이를 신학적으로 답해 보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생태 신학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생명 의료 윤리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이에 답해 보려는 노력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엮는 생명 신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 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단지 다른 것과 함께 그것이 얼마나 성경에 충실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사실 이것은 오늘날 관심의 대상이 되는 소위 적나라한 공적 영역”(naked public area)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의 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만 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세상이 알아듣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신학적 논의를 하여 주기 원하는 요청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공적 신학에 대한 관심이라고 요약하여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신학과 철학의 관계와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분명히 하려는 항존적인 문제가 우리 주변에 계속 나타나고 있다. 특히 진화론에 대한 관심과 영향 때문에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좀더 명확히 해야 한다는 관심과 노력이 점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구원 문제와 관련해서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전통적인 배타주의(exclusivism)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종교에 다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적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도 늘어 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보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내포주의(inclusivism)의 입장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 내에서도 종교다원주의적 견해와 내포주의적 견해와 현상들이 점차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궁극적으로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전도와 선교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반응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반응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에게 온전히 의존하여 살아가지 못한데서 발생한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그것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종교 다원주의적 주장에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고 보여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의 사명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4-2. 오늘날 조직신학의 과제

     

    조직신학은 교회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1) 일차적으로 교회가 기독교의 신념 전반을 제대로 가르치고, 또한 가르침 받고 있는 지를 점검하는 데 조직신학의 내용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직신학이 설교에 대한 긍정적 비판 작업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설교와 가르침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 전부에 충실한 것인지를 우리는 항상 깊이 있게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전부를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경륜 전부를 가르치며 그에 충실하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2) 둘째로는 전통적으로 교회의 바른 전통을 유지시키며 발전시키는 일에 조직신학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우리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서 성경에 일치하는 것은 보존하면서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고, 또한 전통 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서 비성경적인 것은 성경에 근거해서 제거하는 그리하여 교회를 항상 개혁하도록 하는 역할을 조직신학이 감당할 수 있다. (3) 또한 교회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 앞에서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성경에 근거해서 바르게 안내해 주는 역할을 조직신학이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와 첨예화되어가는 자본주의, 물질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는 일도 조직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들이 물질계를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활용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기독교는 영만을 추구하고 물질과 육의 세계를 전혀 도외시해 버리는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에서 가장 큰 이단의 하나로 나타났던 실제적 영지주의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니, 그런 성향이 플라톤주의와 동양 사상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므로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기독교는 이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며, 물질적인 것이 모든 것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적 주장과 같이 할 수도 없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형태의 유물론이 있는 데 그 하나는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반의 하나가 된 포이에르바하적인 유물론이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을 물질과 재화에 근거해서 판단하고자하는 자본주의적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유물론에 다 저항하는 독특한 입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꾀로 인한 타락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빛에서 보는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타락의 빛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영혼과 정신과 일반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언급되는 것조차 모두 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관찰되게 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것이고 그 자체로 선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는 구속된 것은 모두 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주의적 세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자체에 매몰해 들어가는 일이 없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피조 세계를 잘 돌아 보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 많은 이들이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으로 관찰하고 있는 소위 포스트-모던적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일도 조직신학이 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인문주의적 환경 가운데서 그 영향 하에 있으면서도 인문주의 인본주의에 대항하면서 종교개혁적 작업을 하였고, 계몽주의적인 현대주의(modernism)의 도전 앞에서 진정한 현대인으로 있으면서도 성경에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주의적 입장을 명백히 하여왔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관찰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사상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 정황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포스트-모던 사상에는 분명히 저항하는 일을 해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시대정신(Zeitgeist)에 대항하는 대항자들(protestants)이었음을 명확히 의식하면서 말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조직신학 연구가 오늘날 좀 더 지향해야 할 과제들을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모든 논의를 좀더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개념에 좀더 충실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 신학적 개념을 부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하는 데서 오는 문제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성경과 성경적 정통에 충실할 것이 요구된다. 오늘날의 많은 신학적 논의들이 고의적으로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성경과 성경적 전통을 벗어나 나아가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리고 난 후에 다양한 가능성을 열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과도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대화를 통해서 우리의 성경적 입장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화를 통해서 성경적 입장까지 바꿀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계몽주의적 제국주의적 논의임을 의식해야 한다.

     

    4-3. 이런 조직신학과 관련해서 기독교 교육이 할 일

     

    이런 조직신학의 정황과 관련하여 기독교 교육학은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신학의 내용에 근거해서 교회 공동체를 가르치고 교회 공동체를 형성시키는 일에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개혁파 정통신학에 가장 충실한 입장에서 서서 신학적 작업을 하시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가르칠 내용을 확정하고, 그것을 어떤 순서로 배열하여 가르칠 것인지를 잘 계획해야 한다.

     

    또한 교리 내용을 어떤 성경에 근거해서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지를 같이 논의하는 일도 조직신학자와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과 교육학자들과 교육자들이 협력하여 논의할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각자의 전문적 영역의 기여를 하여 각각의 학문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합하여 교회 공동체 전체를 세우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일로 기독교 세계관을 잘 교육하는 일에 조직신학으로부터와 성겨 전문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일은 결국 이 땅의 기독교 세계관을 잘 수립하여 학문 분과 전반에 걸친 기독교적 접근의 토대를 마련하는 기여를 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신학적 시도들이 교육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검토하는 것도 교육학과 조직신학의 협력적 논의의 중심한 한 부분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 교육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조직 신학을 위해서도, 그리고 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매우 의미 잇는 작업을 하는 것이 된다. 자유주의적 교육을 할 때 과연 어떤 결과가 교회와 사회에 나타나는지, 신정통주의적 교육을 할 때 과연 어떤 결과가 교회와 사회에 나타나는지, 해방신학적 교육을 할 때 과연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여성주의적 교육의 결과가 어떤 것이지, 종교다원주의적 교육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포스트모던적 교육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철저한 개혁파 정통주의적 교육의 결과와 역사적으로 검토하는 일 뿐만 아니라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일도 기독교 교육이 해야 할 작업의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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