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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른 예배는 과연 어떤 예배인가?
    신학이야기 2011. 2. 25. 12:35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예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 철저히 의존하는 예배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성자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의존하여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한 순간도 성자의 구속 사역에 의존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가 아니다. 진정한 예배는 항상 성자의 구속 사역에 의존하여 드려지는 것이고, 인간의 공로와 힘씀에 의존하여 드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주교회의 종교 행위들과 개신교회의 종교 행위의 근본적 차이가 여기서 나타난다. 천주교회의 신인협력적(神人協力的)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는 그들의 구원론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 행위 전반에 대한 이해에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는 주입된 은혜에 근거한 인간의 종교적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 교회에서는 구원 이해에서 철저히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칭의함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이신칭의적 이해는 구원론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들에 대한 개신 교회의 이해에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개신교회에서는 우리의 어떤 종교적 행위, 예배나 기도나 금식이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그것이 하나님께 공로가 되거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라고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상당히 많은 개신교도들이 우리의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어떤 공로를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이 소위 개신교도들이 얼마나 개신교의 원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공적 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가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있게 되는가?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에 대한 의존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존하는 우리들은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이는 우리가 도무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 누가 하나님의 사유하심이 없이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단 말인가? 주께서 죄를 감찰하신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죄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죽음을 자초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서서 경배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이 온전한 것이 되어 우리를 감싸 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에 의존하여 그것으로 싸여 져서 속함을 얻고 감히 하나님 앞에서 경배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도 그것이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이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정화되고 거룩해 져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한다. 우리의 기도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은 중보자의 희생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 행위 전체가 모두 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의존하며 그것에 근거해서 드려지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 찬양, 감사, 예배의 모든 것이 종국적인 더 큰 제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존한다는 것을 칼빈은 매우 강조한다(Institutes, 4. 18. 16).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의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연결시켜 주셔야만 우리가 그 십자가의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데, 우리를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주시는 이 일을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예배의 한 부분인 기도의 경우에도 칼빈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바르게 기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도만이 아니라 예배 전체가 성령님의 인도와 감화 가운데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도 우리는 성령님께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성령님께 의존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님에게 의존해서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적용받을 수 있다. 성령과 연결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된 사람이다. 따라서 참된 영적 예배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존하고 그를 부르며, 자신을 부인하고 순전한 양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방식으로라도 자신과 자신이 하는 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영적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니, 영적 예배는 성령님을 의존함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정한 경배는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이런 특성은 설교 전에 하는 조명을 위한 기도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 칼빈의 설교 전에 한 기도의 한 예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우리의 구원 전체가 당신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오니 이제 당신님의 성령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마음들이 모든 세상적 생각들과 육체에 집착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주시어, 우리가 당신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며, 우리들에 대한 당신님의 은혜로운 뜻을 인정하게 하시며,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지한 기쁨과 찬양으로 당신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하시며, 당신님을 영광스럽게 하게 하소서.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1961], 209, Butin, “Preaching as a Trinitiarian Event," 220-21에서 재인용, 강조점은 주어진 것임).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는 우리 안에서 이 일을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행위의 한 부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이 열매를 내는 이 삼위일체적 예배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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