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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CC의 문제점에 대한 한 고찰
    신학이야기 2010. 4. 10. 09:02

     

     

    <광장의 신학> (수원: 합신대학원 출판부, 2010)에 실린  WCC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각주 를 비롯하여 이 글 전체를 잘 보려면 이 책을 잘 읽고 소개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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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120개국의 349개 교단의 여러 교회들의 하나됨과 공통된 증언과 기독교적 봉사와 섬김을 위한 교회들의 교제”를 지향한다는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현재 이에 동참하고 있는 주된 인물들의 신학적 사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그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의 증언을 위해 같이 있고 또 그렇게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 1차 총회에서부터 2006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에서 열린 9차 총회까지의 역사를 볼 때 분명히 나타난다. 이 WCC 운동에 한국 교회가 과연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적어도 외적으로는 한국 장로교회의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 원인이 (또한 성결교의 분열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WCC가 많이 바뀌어서 원래 WCC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했던 통합측의 WCC 총회 유치 성공을 보수적인 교단들이 국가적이고, 한국 교회적인 경사로 알고 축하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WCC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보수 교단들도 그 신학과 입장이 많이 바뀌어서 WCC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일까? 이런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1차 총회부터 근자까지의 WCC 운동과 그 신학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이미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많이 내었으므로, 이 짧은 글에서는 WCC에서 최근에 낸 문서들에는 어떤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의심의 해석학”과 모든 것의 상대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는 WCC는 결국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해석학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WCC는 “하나됨[정합성]의 해석학”(a hermeneutics of coherence)과 함께 “의심의 해석학”(a hermeneutics of suspicion)도 존중한다고 밝힌다. 이를 하나로 묶은 것을 “책임 있는 에큐메니칼적 해석학”(a responsible ecumenical hermeneutics)이라고 하면서 이런 “계속되는 과정인 책임 있는 에큐메니칼적 해석학은 의심에 의해 깨어서 항상 하나됨(정합성, coherence)을 추구하면서 진리를 섬기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에큐메니칼적 해석학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인간적인 작업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교회적 행위이므로 항상 기도의 맥락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성령에 의존하여 기도하면서 하나 됨을 추구하면서 진리를 섬기려 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사람은 없지만 그들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의심의 해석학으로 인해 항상 모호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분들은 대개 성경에 명백히 있는 것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그것도 우리가 해석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분들이 말하는 하나 됨의 해석학은 결국 다양한 기독교 전통의 긍정적 상보성(positive complementarity)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Section B, 2, Paragraph 28).

     

    교회는 해석학적 공동체(a hermeneutical community)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제시하는 것은 좋고, 그것을 설명할 때 그 안에서 주어진 본문들이나 상징들이나 실천들을 새롭게 탐구하고 해석하려는 헌신이 있는 공동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상징이나 실천들에 대해서는 전혀 반론의 여지가 없고 동의할 수 있지만, 이 분들이 아주 분명히 포함시키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도 새롭게 탐구하고 해석하려고 해야 한다(Section A, 1, Paragraph 7; Section B, 3, Paragraph 28)고 할 때에 그 성경에 대한 태도와 방향이 우리를 상당히 불안하게 만든다.

     

     

    2. 기본적으로 바르트주의적 성경 이해

     

     

    해석학적 문제를 깊이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WCC는 1963년 카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던 제4차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세계 회의에서 제시한 하나의 전통에 대한 여러 전통들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를 다시 제시한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의 전통은 “복음 자체”, “교회의 삶 가운데 제시된 그리스도 자신”, “복음의 전승”(the paradosis of the kerygma), “한 복음, 즉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교회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속 전달되기를 의도하신 전통”을 뜻한다(Section B, 1, Paragraph 18). 그들은 이를 “그리스도인 하나의 진리요 실재”라고도 표현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적 현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Section B, 4, Paragraph 32). 그런데 그들은 이것이 “성경 가운데서 증언되고 있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전달된 것”이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성경은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므로, 성경은 그 특정 상황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적 현존을 증언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성경은 진리와 오늘날의 인간적 이야기들의 의미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a measure for the truth and meaning of human stories today)을 제공한다고 한다는 것이다(Section B, 2, Paragraph 24).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을 형성하는 일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에 동의할 뿐(Section B, 2, Paragraph 27)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해석의 과정에서 성경의 본문이 근본적 규범과 시금석(the primary norm and criterion)이 된다고는 말하고(Section B, 2, Paragraph 27) 성경 자체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하에서 살아 있는 한 전승(the Tradition)을 언급한다고는 말하지만 이분들은 성경의 본문 자체를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분들이 말하는 그 하나의 전통,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현존에서 계시되는 그 진리는 “종국적 언어적 정의(定意)나 개념적 논의의 시도를 모두 거부하는, 살아 있는 종말론적 실재”(a living, eschatological reality, eluding all attempts at a final linguistic definition and conceptual disclosure)이기 때문이다(Section B, 4, Paragraph 37). 따라서 이 분들은 성경 본문에 대해서도 우리들이 사용하는 상징들이나 예전이나 다른 전통이나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성(the relative weight)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Section B, 3, Paragraph 31).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에 대한 모든 표현들을 초월한다”는(Section B, 4, Paragraph 32) 말로 다시 요약할 수 있는 이런 태도는 결국 칼 바르트(Karl Barth)가 복음과 성경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이 분들은 바르트의 통찰을 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도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각 교회들을 영감하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교회의 통일성 안에서 그 한 전통(the one Tradition)을 구현하기를 항상 목적하면서 다른 교회들과의 대화 가운데서 자신들의 전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다시 해석하는 데로 이끌어 가신다.” 성경을 “영감”하시는 성령님의 사역과 이 본문에서 말하는 각 교회를 “영감”하시는 방식의 차이나 관계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아주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전반적 기조로 볼 때 이 분들은 본질적으로 그 차이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WCC와 관련하여 말하고 활동하는 이 분들은 성경 자체를 계시하고 단언하기는 어려워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분들은 성경의 이런 성격 때문에 오늘날에 성경의 뜻을 드러내려면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천주교의 언표를 의도적으로 인용하면서 공언한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현재까지는 아직도 WCC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은 천주교 인사들의 논의를 끌어 들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더 나아가서 WCC는 역사 비평적 방법뿐만 아니라, 좀더 전통적 해석과 좀더 최근의 해석 노력들도 다 포괄한다고 공언한다(Section B, 2, Par. 22). 즉, 본문에 대한 교부적 접근, 예전적 접근, 설교적 접근, 교의적 접근, 심지어 알레고리적 접근까지를 역사 비평적 방법과 같이 연관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며, 또한 근자의 사회학적 해석과 사회과학적 해석, 문예적 특성을 살피는 접근들, 독자-반응 비평, 여성주의적 해석, 해방주의적 해석들을 모두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에큐메니칼적 해석학은 이렇게 넓은 근거를 지닌 성경적 성찰들에서 기원한 통찰의 다양성을 환영한다”고 말한다(Section B, Par. 26). 이런 해석들이 상호 대립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의식하면서 표현하면서도,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논의를 하지 않고 있는 점에서 어떤 점에서 무책임하게 과거부터 현대까지 제시되는 모든 해석 방법을 다 허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다른 대화 상대자가 어떤 구체적 해석을 특정한 신앙과 실천 문제에 대해 적절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여긴다고 할지라도 본문의 적용성을 배제되지 않는다”고(Section B, 2, Par. 26) 말하는 데서도 이런 허용성만이 강하게 나타날 뿐이다. 여기서 배제되는 해석은 선택적이고(selective) 편견에 찬(prejudicial) 해석들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남아공에서 인종 차별(Apartheid) 정책을 정당화하던 해석 같은(Section B, 3, Par. 28; Section C, 1, Par. 40) “각 상황 가운데서 생명을 부인하는 결과를 내는 해석들과 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Section D, 1, Par. 52). 그와는 대조되는 성경의 더 넓은 증언과 억압 받는 자들의 경험을 중시하는 해석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인류의 공평성이라는 가치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 좋은 해석이라고 미리 규정되어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 우리의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3. 종교 개혁의 근거를 무너뜨림(1):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버림

     

     

    그러므로 WCC 활동을 하시는 분들에 의하면 개혁파 전통을 포함한 교회사의 다양한 여러 전통들은(traditions) 이 하나의 전통(the Tradition)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나, 이것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하므로 그들은 몬트리올 회의의 이런 이해와 표현이 우리들로 하여금 “오직 성경”과 “성경과 전통들” 이라는 이전의 대조를 극복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강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하면 이제는 더 이상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은 공식적으로 WCC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으나 계속 대표자들을 보내서 대화하고 여러 위원회에서는 같이 활동하기도 하는 천주교회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천주교회를 포함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통일성과 다양성은 모두 다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한다(Section C, 2, Par. 43). 이와 같이 하여 WCC의 주장자들은 종교 개혁의 형식적 원리인 “오직 성경”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스스로 깨버린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적 신앙의 표현이 성경 가운데 표현된 신앙의 정식화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신앙의 규범들은 또한 모든 시대를 통하여 나타난 교회의 삶 가운데서 표현되어 왔다”고 표현함으로써 또한 성경 본문에 대해서도 상대적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Section B, 3, Paragraph 31) WCC 문서들은 성경과 전통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개신교적 입장보다는 천주교적 입장에 가깝게 자신들의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이러니칼하게도 모든 교회를 포용하자는 이 운동이 “오직 성경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배제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 분들의 주장을 따라 가려면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판단 근거요 진리의 기준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논의하는 교회들은 이 분들에 의해서 다음 같은 식을 정죄되면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교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교회는 다른 교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진리를 상실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WCC 총회 한국 유치를 기뻐하며 축하하려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점을 충분히 생각한 후에 그래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지를 스스로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4. 종교 개혁의 근거를 무너뜨림(2): 성찬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를 버림

     

     

    또한 WCC 운동가들은 다양한 교회들이 서로 다른 실천적 모습을 내보이지만 동일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Section B, 4, 35). 이 말을 할 때 이 분들이 특별히 의식하는 것은 천주교회와 개신 교회의 세례와 성찬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비록 시행 형태는 다르고 성례에 대한 이해도 다르지만 이는 결국 같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천주교회의 성찬 이해를 과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런지, 이런 포용성에 대해서 종교 개혁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려는 지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WCC는 여러 교회들이 성찬을 같이 나누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Section C, 2, Par. 46). 이 때 그들은 천주교회와 개신교 모두를 다 염두에 두고 생각하며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적어도 종교 개혁시대의 개혁자들의 성찬 이해와 오늘날 WCC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분들의 성찬 이해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매우 자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5. 종교 개혁의 근거를 무너뜨림(3): 이신칭의 교리를 천주교회와 같이 이해하려함

     

     

    이신칭의에 대한 천주교회와의 대화 문서에 보면 서로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결국은 천주교회적 칭의 이해에 근접해 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는 결국 이 대화에 적극적으로 앞서고 있는 개신교도들이 과연 칭의에 대한 개혁자들의 이해에 충실한 것인지를 의문시 하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6. WCC의 궁극적 관심?

     

     

    이런 WCC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것에 관심을 표현한다: “평화와 공의, 피조계의 온전성을 위한 투쟁”(the struggle for peace, justi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 그것과 연관된 “증언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의식”(the renewed sense of mission in witness and service), 역시 그런 것들과 연관되는 “그 안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의 약속과 신앙의 실천 가운데서의 그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누리는 예전”(the liturgy in which the Church proclaims and celebrates the promise of God's reign and its coming in the praxis of the faith).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는 예전과 선교도 역시 평화, 공의, 피조계의 온전성을 위한 투쟁과 연관된 것이다. 이는 다른 해석적 가능성은 다 용인하면서도 유일하게 인종 차별적인 해석, 여성 차별적인 해석들, 제국주의적인 된 선교적 노력에 함의된 해석들과 같이 각 상황에서 생명을 부인하는 결과를 내는 것들만을 거부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Section B, 3, Par. 28; Section C, 1, Par. 40; Section C, 1, Par. 41; Section D, 1, Par. 52). 물론 성경을 선택적으로 해석하여 인종 차별적으로, 성차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들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다른 해석들도 잘못된 것임이 명확히 지적되어야 하는데, WCC 문서들에서 잘못된 해석의 예들로 언급된 것들은 오로지 이와 같은 윤리적 문제를 낳은 해석들뿐이므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도 WCC에 참여하고 있는 KNCC와 이와 관련된 분들은 민족의 통일을 “하느님의 명령이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사명”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공회 대학교의 최영실 교수는 자신의 독특한 신학적 이해에 근거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한국교회는 추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내적 평안으로 도피하지 말고, 제국주의자들의 거짓평화에 맞서서, 불의에 항거하며 저들로부터 빼앗긴 약자들의 권리를 되찾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약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변질된 법질서와 교리와 이데올로기를 흔들고, 제국주의자들에게 말씀의 ‘칼’과 ‘불’을 던지며 맞서 싸워야 한다.

     

     

    실천신학대학원 대학교의 선교 역사 교수인 이범성 교수도 통일을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물으면 다음 같은 말로 대답할 것이다:

     

     

    중단된 남북 회담과 경제협력을 재개하고,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북이 합의한 대로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남북 화해와 통일을 이루라고 외쳐야 한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보장되었을 때, 주한미군의 철수”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하루 속히 앞당기기 위해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북을 위협하는 한미 합동훈련의 문제를 제기하고, 미국의 핵우산을 요청하며 무기를 사들이며 군사문화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은 또다시 동족상잔의 전쟁을 초래하는 것임을 이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일깨우고, 한국교회가 앞장서서 남북이 합의한 6. 15 공동선언과 10. 4 선언을 이행하여 자주적으로 남북화해와 경제협력, 평화통일을 이루는 구체적인 일들을 선교의 제 1과제로 삼아야 한다.

     

     

    2009년 남북 교회 부활절 공동 기도문의 다음 구절도 아마도 이런 제안의 빛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의의 주님!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시고

    어두움과 죽임의 권세들을 두려워하며, 불의에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평화를 말하는 자들과 분열의 세력에 맞서

    결연히 일어서게 하소서.

    우리를 일깨워 거짓 평화를 깨뜨리며 참된 평화의 역사를 세우게 하소서.

     

     

    우리들은 이런 제안에 대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에 근거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과 명확히 대조되는 이런 주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에 대한 역사 비판적인 해석에 있다. 그는 많은 역사 비판적인 성경 해석자들과 함께 마태복음 28:19-20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은 후대 교회의 삽입문이며,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 의도와도 상충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이해로부터 최영실은 “오늘 우리에게 요구된 선교의 제 1차적 과제와 목표는 제국과 동족으로부터 이중 삼중의 억압과 위협을 당하며 고통 당하고 있는 북의 형제자매를 살리는 일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논의를 하면서 이 분들은 아주 이상스러운 성경 해석을 제시하는 일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의 기도에 대한 최영실 교수의 해석을 생각해 보자:

     

    그 기도는 ‘말’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관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빼앗긴 권리를 찾는 끈질기고도 용기 있는 ‘행동’이다. 과부는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가서 ‘괴롭게 한다.’ 과부의 이 행동은 마침내 불의한 재판관으로 하여금 과부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주는 ‘정의’를 행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약탈당한 약소국가와 약자들은 끈질기게 불의한 강자들을 ‘괴롭히면서’, 빼앗긴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약자를 약탈하는 강자들의 법질서와 거짓 교리들을 폭로하고, 그것들을 깨뜨리고 약자들을 위한 정의의 법을 세워야 한다. 비록 이 일을 하다가 예수처럼 ‘범법자’로 몰려 목숨을 잃을지라도 강자들의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 불의한 강자들이 돌이켜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먹고 마시며 웃고 춤추는 그 날이 오기까지!

     

     

    이와 같은 독특한 해석은 이 분들의 논의의 여러 곳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런 논의에 대해서는 이는 WCC에 참여 하는 일부 사람들의 견해 이지, 그것이 WCC의 공식적 입장은 아니라는 논의들이 자주 제기 된다. 그러나 WCC는 적어도 이와 같은 입장도 충분히 용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넓은 것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7. 마치는 말

     

     

    물론 WCC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동방 정교회에 속한 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고전적 신학의 내용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면도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분들이 주장하는 신학과 종교 개혁적 신학의 심각한 차이, 특히 동방 정교회의 교회적 실천과 종교개혁적 교회의 실천 사이의 상당한 차이도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WCC의 전반적 분위기를 한국의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더구나 개혁파적 교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먼 위치에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매우 힘들다. (WCC에 적극적 으로 참여하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는 분들도 많이 인정하듯이) 호주 캔버라에서 열렸던 WCC 총회에서 한국의 여성신학자 정현경이 한풀이 굿을 선보였던 것은 아주 극단적이고 지나친 예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KNCC에 참여하는 분들의 성경 해석이나 한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논의들에서 보여 주는 모습은 그에 못지않은 지나친 예를 잘 나타내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013년도 WCC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도록 유치하게 되었다는 것은 WCC의 신학적 입장에 공감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신학적으로 WCC의 주장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런 교회들로서는 이 세상에 기독교가 성경과 복음에 충실하지 않은 왜곡된 모습으로 전달될 수 있는 기회가 또 하나 주어진 것임을 생각하면서 심각한 우려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참된 의미를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면 WCC 총회의 한국 유치와 같은 것은 복음의 왜곡이나 다른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고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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