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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 주일을 맞으면서
    신학이야기 2010. 3. 29. 23:56

                              부활 주일을 맞으면서


    올해도 부활 주일이 다가왔다. 이번 부활 주일도 참으로 부활의 의미로 가득 찬 부활 주일이 되었으면 한다. 그저 매년 맞이하는 부활 주일이지 않기를 더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이 마치 영적으로 병든 자들과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생각할 때 이 복잡한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현저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상당히 비정상이고, 참으로 연약하거나 영적으로 많이 병들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평가일까? 만일 우리가 이번 부활 주일을 지낸 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영적으로 병든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 영적으로 병들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될 것이다. 부활 주일을 보내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영적 문제를 자극하고 온전한 데로 돌이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 주일은 우리의 죄로 인한 우리의 영적 사망 상태 때문에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우리 죄에 대한 형벌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의 영적 사망에서 우리를 영적으로 살리기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기념한 후에도 영적으로 병든 상태를 그냥 유지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이며, 그것은 부활 주일의 부활을 기념한다는 말이나 행사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하는 말을 듣는 일이 때때로 있었다. 또한 구약성경에는 엘리사가 기도하여 아이를 다시 살게 한 일이 있었고(왕하 4:35),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에도 나사로(요 11:44)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11-17), 그리고 백부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이 있었다(막 5:21-40).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일과 같은 성격의 사건이 아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다시 살리심을 받은 후에 일정한 기간을 이 세상에서 더 살다가 다시 죽었다. 또한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별로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는 일을 할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그런 성격을 지닌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한 번 살아서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그런 부활이다. 또한 그의 부활은 그대로 종말적 사건이고, 그의 십자가 구속에 참여한 자들을 의롭다하기 위한 부활이며, 그들을 영적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 살도록 하는 부활이고, 종국적으로 그의 재림 때에 그의 부활체와 같은 부활체를 입게 하시는 부활인 것이다. 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예수님 자신의 개인적(personal) 부활이기만 한 것이 아니요 공적인(public) 부활이기도 하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은 참으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고 대속(代贖)하기 위해 죽으신 그 예수님의 개인적이고 인격적(personal) 부활이다. 다른 분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 분의 부활이었다. 또한 그는 영으로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개인적 부활은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우리들의 현재의 영의 부활과 미래의 우리들의 몸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의 수단이 되는 부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자들의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을 보증하는 공적인 부활이기도 하다.

     

         둘째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eschatological event)이다. 구약 시대에 종말에 일어나리라고 한 일이 예수님의 다른 사건에서와 같이 그의 부활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과 같이 부활 사건도 종말론적 사건이다. 구약적 관점에서 종말에 일어나리라고 한 일이 이 세상 역사 한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이 종말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이 세상의 끝이 이른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일들의 성격과 같이 부활도 그 안에서 종말이 이미 임하여 왔으나 이 세상 끝은 아직 이르지 않은 그런 “이미와 아직 아니”의 구조를 지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신약 성경적 의미의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이런 종말론적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여기서 이미 영혼의 부활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대해서 산 자로서 판단하고서(롬 6:11),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영혼이 산 자답게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참으로 믿는 것이며 그것을 참으로 기념하는 것이 된다. 만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한다고 하면서도 마치 영혼이 계속 죽어 있는 사람처럼, 영혼이 병든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 부활 주일을 그리스도 부활의 참 의미에 가득 차게 보내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서 영혼이 산 자로서의 의미가 가득 차게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영혼이 산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민감하게 살아간다. 이 세상을 하나님 살라고 하신 그 뜻을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 그것이 부활 주일을 참으로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다. 부활에서 강조해야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살리시는) 생명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제가 많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영혼이 살아서 참된 생명에 동참하게 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하나의 강력한 방식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 부활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니 말이다.

     

         넷째로,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우리에게 주어질 최종적 몸의 부활을 기다라며 사는 것이다. 이번 부활 주일 이후에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우리들의 몸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그에 근거한 삶의 태도가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중언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지금 여기에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게 한다.

     

        이런 부활의 의미는 우리들의 지금 여기서의 삶과 삶의 태도에서 생생하게 나타내야만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달걀을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부활절 달걀(easter egg)을 전해도 좋고, 부활절 카드를 전해도 좋고, 부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지를 성의껏 써서 전달해도 좋다. 그러나 부활 생명을 전달하는 우리의 부활 생명에 가득 찬 삶과 사랑과 함께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모두 다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그런 부활 생명을 전달받을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단순히 매년의 부활 주일에만 우리에게서 기념되거나 이 세상에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우리는 매 주일을 부활 주일로, 또한 성령 강림절로, 또한 감사 주일로 지키며 기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날마다의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야만 한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체, 그리고 매일과 매순간의 삶이 그와 같은 부활 생명의 약동(躍動)으로 나타나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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