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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살과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우리사회와 기독교 2007. 3. 4. 21:31

     빛과 소금 3월호에 실린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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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자에 유명 연예인이 된 자신의 남자 친구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까를 우려한 어떤 여인의 자살이 있었고, 또 여성 연예인 두 사람의 자살 사건이 있었다. 정 다빈의 경우에는 혹시 타살일까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부검 결과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의 영향으로 또 자살하는 사람도 생겼고, 또 다른 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날까를 걱정하는 상황 가운데 우리 한국 사회가 있다. 2005년 2월 22일에 일어난 이은주의 자살과 함께 이 모든 일들로 인해 모든 국민들이 자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우리의 문제이기도한  자살 문제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최근에 자살한 이들의 진정한 이웃이 못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도 그들의 마음을 깊이 살피지 못했었고, 그들의 자살 이후에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그런 심각한 결론에로 나아간 과정을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유니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가져온 우울증 증상을 가지고서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이 성형 등에 대해 비판하는 것에 대해 어찌할 수 없음, 또 한편에는 오랜 휴지 기간 뒤에 앞으로 낼 음반의 성과에 대한 불안 등이 작용해서 결국은 자살에로 나아간 것이라고들 짐작하고, 정 다빈의 경우에도 다른 이들이 자신에 대해 나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스스로 견디지 못해서 자살에로 나아간 것이라고들 짐작한다. 그러나 다들 짐작일 뿐이다. 그들의 그 결단의 순간과 같이 할 수 있는 이가 과연 그 누구랴?

     

    더구나 이 두 사람이 모두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욱 안타까운 생각들을 하게 된다. 정 다빈의 경우에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다는 내용의 언급이 있던 후에 일어난 자살이어서 더욱 우리를 의아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오늘날 한국 사회 속에서 다른 이들과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 다르지 생각하는 방식들이 매우 유사하고 같은 방식으로 살고, 같이 죽는다. 이것은 한국 사회 속에서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문제이기도 한 자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자살의 근본적 문제

     

    자살은 이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몰려간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측면과 그리나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결국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강한 측면이 함께 있는 복잡한 현상이다. 결국 이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의 극단적인 경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살한 사람들을 용감한 사람들로 생각하거나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도 미화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 한 반대로 자살한 사람들만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런 마음의 자세는[불신앙의 자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 -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이든지, 나를 판단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해서 도무지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경우이든지 -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근원적 불신앙의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지, 그것을 얼마나 깊이 의식하느냐, 그 결과로 자살을 감행했느냐의 문제는 사실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살 현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실제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일에 힘쓸 것을 더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철저히 맡기지 않은 이는 그 정도가 어떠하든지 심각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모르므로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 하다가 자살에로 나아간 것도 안타까운 일이고, 또 그리스도인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것도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한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죄를 지었다.


         그러면 이미 자살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자살한 사람들을 잘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자살한 사람들을 더 정죄할 수도 없다. 물론 자살한 것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자살의 순간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움직이며 어떤 회개를 하고 있는지 모르므로 우리는 자살한 사람들은 모두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말 때문에서 자살해도 구원에는 상관이 없으므로 자살해도 좋다는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개신교에서는 모든 죄를 다 중죄(重罪, deadly sins)로 여긴다. 그러므로 자살도 다른 모든 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이다.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자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하는 자기-주장(self-assertion)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것도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하는 기독교적 존재 방식에 반해서) 그 순간에는 자기-주장의 길로 나아간 것이고, 얼마 전에 자살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해야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에 있어서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나 우리의 활동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오직 철저히 하나님께만 의존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 조바심을 가지거나 불안을 가지는 부패한 인간성의 성향에 반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은 구속에 근거하고 성령님께 의존하여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일에 힘써야 할까?

     

    이 모든 것을 잘 파악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우리 주변에 스스로 삶을 살아가기 어려워하는 이들, 또 너무 있게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이들의 진정한 길동무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두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부터 그리해야 하는가의 우선순위를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우리에게 요구하듯이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당장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있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대단한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그저 우리가 곁에 있어 주기만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여정 가운데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과 같이 있어 주는 노력을 하고, 그리고 주께 지혜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주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가장 지혜롭게 진정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자살 문제를 근거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그 모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존하는 일을 실천하고, 우리 주변에 이런 의존하는 삶을 소개하고 이런 삶에로 초청하는 일을 힘써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복음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불신앙이지만, 기독교의 복음 내용을 알아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루어진 구속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것도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 현상으로 서의 자살 문제 앞에서 더욱 더 하나님을 의존하고 신앙하기를 배우고 그렇게 하나님께 의존해서 사는 일에로 사람들을 진지하게 초청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결국 우리가 전하는 말은 십자가의 구속에서 우리를 그대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께 네 존재 전체를 온전히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과의 인간적인 친밀함을 가진 정황에서 기도하면서 가장 지혜롭게 전달 할 수 있어야만 그 위로의 말이 진정 위로가 되고, 그의 존재를 옳은 데로 오게 하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영원히 참되게 사는 길로 이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의외의 일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면서 정말 지혜롭게 이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상실하고, 그 형제나 자매를 영원히 잃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라도 우리 자신이 모든 일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의 삶을 가지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의존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전하려는 생명의 말씀을 무시하게 하도록 하는 기연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말은 진정한 생명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참 생명의 삶을 살고 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그 생명을 전하는 생명 운동을 해나가야 한다. 내가 사는 방식이 구속 받은 사람의 생명력을 드러내는지, 내가 하는 말이 사람을 살리는 길로, 사람들을 더욱 바른 데로 오게 하는 데 사용되는 지를 늘 생각하면서 그런 생명 운동을 진작시키기 위하 삶과 말과 행동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생명 운동을 하는 것이다. 물리적 생명도 살리고 그것 이상의 존재 전체의 생명을 보장하는 진정한 영적 생명 운동을 힘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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