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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사회 속의 종교 다원주의적 분위기를 경계하면서
    우리사회와 기독교 2004. 5. 25. 01:52
     

    얼마 전 조용기 목사의 동국대 강연과 이에 따른 질의응답 시간의 강연자의 답변 내용 중에 정통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문제시 될 수 있는 표현이 나타난 바 있다. 이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고 CBS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필자 자신의 의견을 물었을 때 필자는 (1) 조용기 목사 본인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여 본인의 입장에서의 사태의 진상을 듣고서, (2) 그에 근거해서 판단하되, (3) 이 일을 기화로 해서 이 일로 드러나게 된 종교 다원주의적 표현과 종교다원주의 사상 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기독교 방송(CBS)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이 강연을 하고 답변을 한 분의 진정한 의견을 듣기 원했으나 본인이 허락하지 않고 대신에 홍보 담당 부목사께서 대신 인터뷰에 응하여 한편으로는 강연과 답변의 내용이 종교다원주의 주장이 아니었고, 다른 종교에서 찾지 못하던 구원을 기독교에서 찾았다는 간증을 한 것이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다른 종교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식으로 말해야만 대화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일 조 목사는 그런 태도로 발언한 것이므로 별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하였다(2004년 5월 18일자 CBS 시사 저널 참조).

     

    조 목사 자신이 인터뷰 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우나 본인들이 종교 다원주의적 의도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말을 믿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나 다 같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표현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불교는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도리를 가지고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의 길이 있는데 그 중에 기독교의 구원 주장이 옳다는 것이라는 뜻으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 표현이 이상하게 된 것인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 된다: (1) 본인들이 종교 다원주의의 의도를 지니고서 말한 것이 아니라면 일단 그 말을 믿고 그런 의도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런 의도로 만한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의도 표현을 종중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일 조 목사께서 불교도 구원의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식으로 말하신다고 생각한 불교계 인사들은 자신들이 잘못된 인상을 받은 것이라고 다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2) 그렇다면 그것을 표현할 때에 여러 사람들이 오해 할 수 있는 표현을 한 것은 적어도 표현의 잘못이나 실수라고 지적해야 할 것이다. 여러 사람이 다 표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이상한 방식으로 말하였거나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다 이상한 표현이요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은 그런대로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문제를 지닌 억지 주장하는 것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자신이 종교다원주의를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받아들이되, 그 표현 방식에서는 잘못이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조 목사의 강연과 질의응답의 표현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만한 어떤 큰 사상이나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큰일인 양 온 기독교회가 논의하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앞에 죄송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우리 사회 속에서 점점 퍼져 가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 사상과 그 표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된. 이 일도 그 배후에는 우리 사회의 만연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적 분위기에 편승한 별 의식 없는 표현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무엇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종교 다원주의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져야만 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이며, 특히 종교인들은 모두 그런 넓은 마음을 가지고 다른 세계 종교들을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적 사상에 의하면,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적 개념이므로 이런 개념을 가지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말하며 이런 기준으로 다른 종교를 잰다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각각의 종교는 그들 나름의 인식의 틀과 이해의 척도를 가지고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각각의 종교는 각각 특이하며,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다양하고도 풍성한 종교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므로 다 그 나름대로 선하고 좋은 것으로 여겨져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의 선구자인 존 힉(John Hick) 같은 이는 구원/해방/각성 등의 포괄적이고 다차원적 개념을 가지고 이 세상의 여러 종교들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같은 구원적 실재를 기독교는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불교에서는 각성(깨달음, enlightenment), 또는 해탈(nirvana)이라고 하기도 하며, 고해와 억겁의 인연으로부터의 해방(liberation)이라고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자들에 의하면 불교의 해탈과 기독교의 구원이 어떤 차원에서는 같은 구원적 사건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불교의 자비(慈悲)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번 사건에서도 질의응답 중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사용된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이 그 발언자의 의도를 심각하게 의문시하게 하는 좋은 기연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정통적인 기독교인은 성경이 말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불교적 자비와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독교 밖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반화가 오랫동안 있어왔다. 그런 것이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의 생각과 사상에도 간접적인 물들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다. 특히 요즈음처럼 여러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열하지 않고 한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시대적 상황 가운데서는 우리들의 의식 없음이 우리가 가진 사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다른 종교를 가지 분들을 존중해 주되, 그들이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퍼져 가고 있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자신은 기독교를 믿고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기독교를 통해 종교 생활을 하는데, 그것이 중요하니 다른 이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 생활하는 것을 문제시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하면서 우리의 사랑을 더 잘 드러내면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적 의지, 복음 전파적 의지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바른 이런 선교적 의지의 상실에 기생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좀더 경계해야 하는 것은 죤 힉과 같은 명확한 종교다원주의자들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종교 다원적 표현을 해대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힉과 같은 이의 주장을 들으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들은 그것의 문제점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해 갈 수 있다. (혹시 그것이 어려운 분들이 있으면 힉 등과의 학문적 논쟁을 실은 <다원주의 논쟁> [서울: CLC, 2001]이라는 번역서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무의식적인 종교 다원주의적 표현들은 많은 이들의 생각과 의식은 더 혼란스럽게 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기회에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모두 다 다음 세 가지 일에 힘쓸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서 우리 스스로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행동과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만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신념과 말과 기독교적 행동 방식과 삶, 교회 생활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기독교가 십자가 구속의 결과로 성령님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가는 가장 인격적인 삶과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서 증언해야 한다. 교회 안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가 이 세상에서 발생하고 이 세상에 노출되면 노출될수록 우리는 스스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된다. 성경을 떠난 방식으로 교회와 기독교를 형성하면 할수록 이 세상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은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식과 말과 사유와 삶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일관서 있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에 힘써야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스스로의 자기 정체성을 지닌 의식과 사고와 삶)

     

    (2)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종교를 가지 이들에게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기독교적 사랑을 잘 전달해서 실천적으로 기독교적 사랑을 전달해야 한다. 우리로서는 모든 이들과 화평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를 핍박하고 괴롭게 하는 이들에게도 용서하며 사랑과 관용의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이 일에서 실패할 때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우리의 이 실패를 기화로 하여 종교 다원주의 주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고 보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간접 전달).

     

    (3) 아주 지혜롭게 기회를 사서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이 세상의 소망인가를 명백히 말하고 증언해야 한다. 혹시 우리가 보여 주는 사랑에 감동한 이들이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물어 오게 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우리는 지혜롭게 모든 기회를 사서(때를 잘 이용하여)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복음 진리를 언표(言表)하고 드러내어야만 한다. 기독교 진리의 최후 진술은 하상 직접 전당일 수밖에 없다(증언으로서의 복음 내용의 직접 전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들어오던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 있어 왔다. 우리 사회 속에서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은 낯선 것이 아니다. 다른 여러 종교들이 병존해 있어서 어떤 이들은 불교를 믿고, 어떤 이들은 유교적 제사를 중심으로 살고, 어떤 이는 도교적 사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중에,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들은 이 종교 다원적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로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영단 번에 해결하는 분임을 믿고 그를 모든 사람이 믿을 것을 증언하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회는 이와 같이 종교 다원적 사회 속에서 예수님의 유일한 구주이심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신이심을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다짐해 오고 증언해 왔다. 그런데 이제 같은 종교 다원적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인의 수가 좀더 있을 뿐인데, 아직도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상황 가운데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희생과 각오와는 전혀 다른 종교 다원주의 주장자들이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회의 이름으로 우리 주변이 많이 있으며, 그런 사상을 기독교 신학 사상의 하나로 여기는 이런 이상한 상황 가운데 우리가 처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성경과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에 근거한 구원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 복음에 따라 고난을 받으며, 그 복음을 손상 없이 증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증언과 실천은 항상 기독교적 덕을 잘 드러내면서 시민적 교양(civility)을 존중하는 사랑의 태도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땅 위에 이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바르게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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