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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개념의 문제들과 성경적 경건의 길(7)신학이야기 2005. 8. 3. 22:00
4. 결론: 영성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에 대한 제언
이 모든 말을 듣고 난 후에 많은 분들은 그것은 우리가 가장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여 올 때 늘 힘쓰던 바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라면 우리는 늘 그런 가장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여 왔을 것이고, 그런 정상적 신앙생활에 근거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모든 측면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잘 순종하는 가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물로 이 마지막 측면에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우리로 회개케 하고 더욱 더 주의 은혜에 근거해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에로 나아가도록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리하는 의미로 과연 바르지 못한 영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열거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자신의 사상이나 삶에서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한 대로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성경적 영성을 향해 가는 이들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적으로 경건한 이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둘째로, 영적인 것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지만 이상한 종교인의 냄새만을 풍기지, 그 삶 전반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여 일관성을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교회의 회원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예배에 참석하며 자신의 삶을 도덕적이게 하거나 영적이게 하는 이들도 온전한 의미에서 성령님께 순종해 가지 않는 것이다. 넷째로, 사회 현상 전반에 대해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의 바른 평가와 그런 평가에 따른 노력이 전혀 없을 때 우리는 아직 온전한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진정한 경건의 사람, 성령의 사람은 그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는 일관성 있는 삶을 향해 갈 것이요, 그 하나님 나라를 교회를 통해,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땅 가운데 드러내는 데 열심인 사람일 것이다. 그는 항상 배우며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이요, 항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과 교제 하는 이요, 먼저는 성도들과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과 서영 안에서의 의와 화평과 희락을 드러내는 이로 나타날 것이다. 이 땅에 교회가 있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데에 있다. 그럴 때 우린 교회는 그 사명을 다 하는 교회고, 그 의미를 잘 드러내는 교회가 된다.
이 모든 일을 다 들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우리가 이런 온전한 의미의 “영성” 개념을 가지고 이 용어를 사용하기 까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현재 사용하는 대로라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동만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 정황을 그대로 놓고 사방에서 말하는 영성을 그들이 말하는 대로 추구해 보라. 그것은 결국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영성과는 거리가 먼 길로 우리 성도들을 인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우리의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런 의미에 따라 무엇이든지 말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성경적인 “영성”만을 “영성”이라고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성경적 영성, 진정한 영성, 기독교적 영성, 또는 그냥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그 때가 되기까지는 아직은 “영성”이라는 말에 대해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영성을 추구하는 개인들을 위해서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로, 특히 “영성 훈련”이나 “영성 수련”이라는 말은 전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사람이 온전히 되는 것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들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인 안에 게시면 그들 안에서 성도의 성장을 위해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것은 어떤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영성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들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체계적이고 잘 단련된 영성 훈련들이 영성 발달의 주된 수단임을 의미“하면서 영성신학을 수덕적(ascetical)인 측면에서 설명한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어떤 방법을 제시하면서도 그것은 그렇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또한 “어떤 성도들은 큰 노력 없이도 여러 단계를 한꺼번에 올라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유일한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런 방법이 상황에 맞게 변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한다. 그리고 훈련의 규칙은 형식주의의 위험을 늘 가지고 있음도 잘 의식한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영성훈련의 주창자들은 그 어떤 형태의 규칙은 항상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훈련으로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을 영성 훈련의 주창가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영성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성 신학을 말하는 이들도 어떤 하나의 유형으로 사람을 규정하거나 훈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방법에 따라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인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께 그 때 그 때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게 하시며, 우리 상황에 적용하여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시며, 순종할 수 있는 힘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 진정으로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 성령님께 속한 사람임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영적으로 어린 이들도 그 수준에서 성령님께 순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은 성령님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면 성장한 이들은 더 온전히 성령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다 성령님께 순종할 때에만 우리는 온전한 성령의 사람일 수 있다.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중생에 근거해서 우리가 신령한 자들임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해서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와 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왔으며 그의 재림으로 극치(極致)에 이르게 될 그 하나님 나라를 강력히 증시(證示)해야만 한다. 여기에 우리의 신령한 자요 그리스도인인 존재의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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