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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까?교회와 설교 2020. 5. 16. 11:51
그리스도인입니까?=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매우 중요한 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듯이 별로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매우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땅합니다.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삼위일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모호해졌습니다. 이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교회들의 성도들조차도 과연 삼위일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그저 모호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려고 하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현상입니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는 우리들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잘 의식하였는데,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몽롱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지 않게 되고, 그 결과 결국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배도(背道)의 길로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모호한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 모호한 상태에 계속 있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결국 배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정확히 알려고 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바른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이신 분이십니다(신 6:4; 고전 8:4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만난 분들은 그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고, 성경은 일치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아주 명백히 합니다(요 1:1, 14, 18, 3:16, 18, 5:18-25, 10:36, 20:28; 롬 9:5; 고후 4:4; 갈 4:4.; 빌 2:6; 골 1:15; 딤전 3:16; 딛 2:13; 히 1:1-4; 요일 4:9, 5:20 등). 예수님을 그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동시에 참된 신성을 가진 분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바로 믿을 때, 우리들은 동시에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성령님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실 성경님을 말씀하셨으니(요 15:26), 성자와는 구별된 성령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께서도 온전한 신성을 가졌음을 성경이 증언합니다(마 28:19; 행 5:3, 4; 롬 8:11, 9:1, 15:19; 고전 2:10, 11, 3:16, 12:11; 고후 13:13; 딤후 3:16; 딛 3:5; 히 9:14). 여기까지를 인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성경을 바로 믿기만 하면 여기까지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을 생각하면서 잘못 생각하면 이단이 됩니다. 우선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즉 성부께서만이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교나 이슬람교화 같은 타종교이거나 16세기에 시작된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나 19세기에 시작된 성부 단일주의(unitarian)의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신데 로고스가 그 안에게 역사하였다고 말하던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arachianism)도 역시 이단입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님을 믿되,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삼신론도 명백한 이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명료한 삼신론은 아니지만 삼신론적 정향을 행해 나가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됩니다.
성자의 온전한 하나님되심을 생각하지 않고, 성자는 조금 못하신 하나님, 심지어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4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아리우스(Arius, 250 or 256–336)를 따르던 아리우스주의(Arianism)도 역시 이단입니다. 그런 생각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아주 이상한 생각도 하였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구약 시대의 성부께서 성육신하신 분이 성자이시고, 그가 하늘로 오르시면서 다시 오신 분이 성령님이라는,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고 성자가 성령이시라는 양태론(Modalism)도 이단입니다. 215년경에 리비야와 아마 로마에서도 융성하게 활동했던 사벨리우스(Sabellius)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를 쉽게 설명한다고 하면서 양태론적인 설명을 하는 일이 우리들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한 분이 교회에서는 목사님이고, 학교에서는 교수님이고, 가정에서는 아버지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성부이시고, 성자이시고, 성령님이시라는 설명이 그런 예입니다. 또한 물의 분자 구조를 가지고, 물질의 삼태에서 양태기 다르나 다 같은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다르게 나타나지만 다 같은 본질을 가졌다고 설명하는 것이 이런 양태론적인 설명입니다. 이것이 이단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면 교회들에서 이런 예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단적 생각들을 다 배제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께서 (1) 한 본질(one and the same essence)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3)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distinction)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명백히 하려면, 성부와 성령님께서는 성육신하지 않으셨고, 오직 성자께서만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면서 세례요한 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고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는 정황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여기 한 장면에 이 땅에 계신 성자와 그 위에 임하신 성령님과 말씀하시는 성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부가 곧 성자이고, 그가 곧 성령이라고 말하려는 양태론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 성부, 성자, 성령님의 구별되심(distinction)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성부께서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께서는 성부가 아니시며, 또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가 아니십니다.
이 삼위(三位)는 합하여 하나가 되시거나(fused) 혼합되실 수(mixed together)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은 각기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영원히 구별되는 존재들(subsistence)이시나, 하나의 동일한 본질(one and the same essence)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하시거나 성령이 성자에게 종속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동등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나 그것은 성자가 본질상 성부에게 종속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동등하신 성자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겸손히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위격상의 동등하심과 사역상의 순종”이라는 말을 기억해 놓으면 좋습니다. 여기 참된 겸손이 드러납니다. 성부와 동등하신 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 말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께서 (1) 한 본질(one and the same essence)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3)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distinction)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복잡한 말을 매번하는 대신에 그것을 간단히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요구를 합니까? 다음 세 가지를 제대로 해야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하고, 누구를 찬양합니까? 이때 아주 명확히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물론 계속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일단 모호하게 “하나님, 주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전 시대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명시하던 찬양을 많이 하는 것이 좋고, 오늘날 우리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찬양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할 때 누구에게 하시나요?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기도할 수도 있고, 성부나 성자나 성령님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성자나 성령님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나 가르침은 이단적입니다. 항상 기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해야 합니다.
셋째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늘 맛보아 가는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님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요 14:16) 이를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마 28:20) 이것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성부께서도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추상적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와 함께 사는 역동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바른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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