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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10차 총회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신학이야기 2013. 10. 30. 23:35
2013년 10월 30일부터 대한민국 부산 벡스코에서 WCC 10차 총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그 때 그 때의 문제점들을 언급해 가기로 하겠습니다.
<10월 30일> 개회 예배와 관련하여
전체적으로 분위기를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알단 사람들이 그들을 대표하는 것들을 가지고 행진하여 들어와 단상에 배치시겼습니다. 그리하여 단상에는 십자가와 촛불과 아이콘과 그외 다른 것들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으려는 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개혁자들의 의식을 잊어 버려서 그들이 피흘리면서 제거한 것들이 슬그머니 우리들의 눈 앞에 나타나게 되어도 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음을 매우 심각하게 여겨야 합니다. 동방 전교회 사람들과 같이 모여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까요?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설교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하는가요? 천주교회는 공식적인 회원 교회는 아니지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각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고, 그들도 많이 참관하고 있으므로 그들도 배려해야 하니 할 수 없다고 해야 하나요? 이것을 개혁자들이 어떻게 보려는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역사의식을 망각한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요?
이번이 이 모임을 주관하도록 한 상당히 많은 교회는 그래도 명색이 개신교회(protestant)인데, 그냥 그렇게 같이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애통 순서의 기도문들을 그 맥락에서 깊이 있게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저 단순하게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돌아 보라주시라는 것이 아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민거리들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온갖 회의와 의심과 피로와 곤핍 속에서 우리가 주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며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전체 기도에 대해서도 순진한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 배후에 이 모임 전체의 방향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아시아·카리브·유럽·라틴아메리카·중동·북미·태평양 등 지역별로 "울부짖음·부르짖음과 소망"을 담은 기도문을 각자의 ‘난곳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퍼포먼스하는 것도 그 숨은 의도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프리카가 간직했던 주님의 아름다운 형상은 욕심 많은 자들이 자원을 빼앗고, 공동체를 갈갈이 찢어발긴 경계선을 놓고 싸우는 동안에 온통 일그러져 버리고 말았으며, 여성과 소녀들을 주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성욕의 대상으로 여겨 괴롭혔다”며 “주님의 탄식소리가 마주 울리듯, 강물은 말라 버리고 호수가 범람하며 목초는 할퀴어졌으니 오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정의와 평화를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도 과연 무엇이 이들의 주된 관심사인지를 보면서 바라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어려움 가운데 잇는 아프리카 대륙과 그 속의 사람들을 주님께 부탁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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