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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장로교회의 아버지 Thomas Cartwright (c. 1535 – 1603).
    신학이야기 2011. 8. 11. 00:57

    <합신은 말한다> 최근호에 실린 글을 소개합니다:

    안타깝게도 영국은 장로교회가 한 번도 깊이 뿌리내려 보지 못한 나라이다. 이전에도 영국 땅에 장로교도들이 있었지만 늘 소수였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성경적으로 믿고 성경적인 교회를 형성해 가는 것을 가장 잘 가르친 장로교적 청교도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허트포드셔(Hertfordshire)에서 태어나, 캠브리쥐의 St John's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553년 메리 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다른 청교도적 성향의 학생들과 함께 대학에서 밀려나 법률가의 서기 역할을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5년 뒤 엘리자베뜨 여왕이 즉위하자 그는 25세 때에 캠브리쥐로 다시 돌아와 얼마 후 St. John's College)의 연구원(fellow)로 선출되고, 그 뒤에는 같은 캠브리쥐의 Trinity College의 연구원(fellow)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설교를 하였다. 한 동안 아일랜드에서 알마흐 대주교인 아담 로프투스(Adam Loftus, Archbishop of Armagh)의 설교자로 사역했다(1565-1567). 1569년에 34세의 토마스는 캠브리쥐의 레이디 마가렛 신학 교수( Lady Margaret's Professor of Divinity at Cambridge)로 선임되어 사도행전에 강의를 했으나, 그 다음해 12월 존 휘트기프트(John Whitgift)가 총장(vice-chancellor)이 되어 그를 교수직에서 면직시켰고, 1571년 9월에는 트리니티 컬리쥐의 연구원(fellow) 직위도 박탈했다. 이는 카트라이트가 영국 교회의 감독 제도를 초대 교회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사도행전이 말하고 그에 따른 초대 교회의 모습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만이 교회에서 인정되고 실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기에 그는 이런 고난을 당했다. 주교들의 통치를 노회의 결정에 의한 다스림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카트라이트의 주장을 엘리자베뜨와 영국 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영국을 떠나서 제네바에 가서 베자와 교제를 나누었다. 1572년 그가 다시 영국에 돌아 왔을 때 그는 히브리어 교수(professor of Hebrew), 즉 구약 교수가 될 수 있었으나 영국 장로교회의 총무라는 별명의 존 필드(John Field) 등의 “국회에 드리는 권고”("Admonition to the Parliament")에 동감하면서 그 “서문”을 쓴 것 때문에 오히려 도망하는 신세가 되어 다시 국외로 나가 안트베르프(Antwerp)와 후에는 미델부르그(Middelburg)에 있는 영국인 피난민들을 목회했다.

     

    1576년에는 채널 아일랜드의 위그노 교회들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고, 다시 안트베르프 영국 피난민 교회의 목회를 하다가 50세 되던 1585년에 허락 없이 런던에 왔다가 체포되어 두 달을 감옥에 있기도 하였고, 영향력 있는 지인들의 노력으로 월윅(Warwick)의 라이세스터 백작 병원의 master로 있었으나 500여명 목사들이 카트라이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성경적 교회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자 1590년에 다시 특별 법원(the court of high commission)의 재판을 받아 감금 되었고, 1591년에는 다시 프리트 감옥(the Fleet prison)에 2년간 수감되었다. 그를 위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풀려나와 노쇠한 말년에는 Warwick에서 살다가 엘리자베뜨 여왕이 죽던 해(1603)에 그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카트라이트는 상당한 교양과 학문을 지닌 사람으로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장로교회적 입장을 가지고, 독립파와 분리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 시기의 장로교적 청교도 운동의 조직과 힘을 모두 그에게서 영향 받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 뜻에서 그야말로 영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의도가 영국 교회 안에서 한 번도 온전히 실현 되지 못했지만 그 정신이 오늘 우리들에게서 온전히 나타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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