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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2)신학이야기 2011. 10. 22. 23:45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2)
모든 기독교적 활동의 기초 다지기
지난 호에서 우리들은 카이퍼는 우리에게 가장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건전한 교회의 모습, 건전한 기독교 문화 활동의 이상(vision)을 제시하여 주었다는 데에 가장 근본적 기여가 있다고 논의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이런 건전한 그리스도인과 그의 활동이 진정 기독교적인 것이 되기 위한 기초는 무엇인가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이를 신앙적 기초, 또는 신앙적 동기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모든 기독교 활동의 토대로서의 기독교 신앙
카이퍼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요점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다른 신념을 가지고 다른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기본적 신앙이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그 경우에는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신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근원적인 헌신 배후에는 그 나름의 신앙이 있고, 그것이 가장 근원적 동기가 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였다. 이점을 카이퍼를 따라서 잘 강조했던 분이 도여베르트(Herman Dooyeweerd)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근원적 헌신 배후에는 다 신앙이 있다면 기독교적 헌신 배후에는 기독교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학생 때에 또한 목사 초년생 시절에도 자신에게 신학을 가르친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을 따라서 자유주의자이었던 카이퍼는 후에 이점을 아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에 철저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아주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고 한다고 해서 다 기독교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을 카이퍼 자신은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일이 지속될 때에 그 사람과 그런 소위 교회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날 한국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하고 기독교적 활동을 한다고 하는 우리들이 깊이 유념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과연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것인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따라서 우리의 활동도 기독교적 활동이 아니며, 우리 교회도 기독교회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카이퍼는 근본적으로 급진적(radical)이다. 우리들이 흔히 오늘 날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급진적이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들로 하여금 근본적인(radical) 질문을 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radical한 것이다. 이 질문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질문은 한 세대 전체가 묻던 때가 있었다. 그 때가 바로 종교 개혁신대였다. 중세 말기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주일은 물론 여러 번 예배한다고 하는 우리들이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진정한 교회인지를 묻고 답하려고 했던 (그러므로 그저 믿는다고 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한다고 해서 진정 교회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명백히 천명했던) 종교개혁시대의 성도들과 같은 질문을 카이퍼는 자유주의 목사였던 자신과 자신의 시대의 교회에 제기했던 것이고,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진정 기독교인이려면 진정한 기독교적 활동을 하려면 이 질문을 스스로 깊이 있게 하고 대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카이퍼는 정통적 교회가 항상 그리했듯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분명히 믿음으로 기독교 신앙에 충실ㅎ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기독교 신앙(1): 중생의 필요성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믿음
카이퍼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인간이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천명한다. 물론 타락한 인간들도 일반 은총 덕분의 진리의 파면을 말하고, 시민적인 선을 행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참된 진리도 아니고 참된 덕도 아니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천명한다. 카이퍼가 이를 강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시기의 사유 방식 때문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기독교 자유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비록 타락했다고 해도 상당히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카이퍼가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뒤에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생각해 보니 타락한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특히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소경이요 따라서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존재이며,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런 영적 소경됨으로부터 도무지 자신을 구원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역사(役事)하셔서 인간을 영적으로 다시 나게 하실 때에만 (즉, 重生해야만) 인간은 구원함을 받을 수 있고 그 어떤 희망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영적 활동의 시작은 모두 중생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님의 역사로 중생한 사람은 그의 삶의 모든 부분과 과정에서 끊임없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령님을 의지하여 살며,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첫째 시금석은 타락한 인간의 능력을 과연 철저힌 불신하며, 중생을 비롯하여 모든 일에서 항상 성령님께만 의존하는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2): 십자가 구속의 절대 필요성을 믿음
진정으로 중생한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자신에게나 타른 피조물에게 도무지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에만 근거한다는 것을 철저히 믿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이루시는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는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실 일이 없다”(행 4:12)는 것을 진정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과정에 대한 철저한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믿고 주장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형태의 신인 협력주의(synergism)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둘째 시금석은 십자가에서 구속(atonement)이 일어났음을 철저히 믿고, 구원을 위해서는 이 십자가에서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지의 여부이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능력으로 구원하심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신다든지, 또 구원의 궁극적 범위에 대해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해야 한다는 등의 생각을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우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어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기독교 신앙(3):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절대성을 믿음
그 이유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만 내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개혁자들과 카이퍼 등이 강조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라는 말의 뜻이다. 모든 것을 고려하되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만 모든 문제의 최종적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성경 전체(tota scriptura)의 가르침을 준거틀로 하여야만, 오직 성경의 원리를 오용하지 않게 된다. 성경은 그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부분을 중요시하며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모두 다 받아들이며 중요시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실제 시 공간 가운데 있었고, 그 안에서 타락했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들, 예수님의 몸의 부활, 예수님께서 그 몸을 가지시고 하늘에 오리우셔서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심, 그 몸을 가지고 다시 오실 것임 등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다 믿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대해서도 성경이 자증(自證)하는 것과 같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믿으며, 그 영감의 과정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유기적이어서 인간의 모든 능력을 다 사용하시되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축자 영감을 믿으며, 우리의 신앙과 생황의 유일한 규범이 됨을 주장한다. 이 일도 카이퍼가 자유주의자였을 때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매우 강하게 주장하는 점이다. 그 시기의 카이퍼는 성경을 다 믿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정통 기독교로 돌아 온 이후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정한 기독교적 사유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셋째 시금석은 성경을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이다.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기독교 신앙(4):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 몸된 교회의 지체 의식을 가짐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시신이 이 세상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하여 갈 수 있다고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으로 그의 영적인 몸(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인 교화 공동체를 세우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는 구속받음 성도들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며, 교회를 구약 시대의 성전과 혼동하지 않으며, 교회 공동체가 모이기 위한 건물인 예배당(혹은 교회당)을 교회와 혼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구속 받은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 공동체의 한 부분임을 감사히 여기며, 그 교회의 지체 역할을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회 공동체를 중요시하며, 그 교회 공동체의 예배(leiturgia)와 교제(koinonia)와 섬기는 활동(diakonia)과 교육(paideia), 그 지체(肢體)로서 사는 삶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인 말씀과 성례를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중요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넷째 시금석은 성경에 따라서 교회 공동체를 제대로 이해하며, 그 교화 공동체로서의 지체 의식을 가지고 사는가의 여부이다.
기독교 신앙(5):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구현하는 적극적 활동을 함
그러나 진정한 생활은 교화 공동체 안에서의 삶으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다. 지난 호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진정한 신앙인은 그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이는 어떤 종교인의 냄새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태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성령님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참된 신앙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나타나게 된다. 더구나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이 땅 가운데서 구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문화를 변혁하는 삶에로 나아 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교화 공동체의 삶은 결국 이 문화 변혁을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시대가 악하여서 전혀 문화 변혁적인 일을 못하는 상황 속의 그리스도인이 잇을 수 있다. 초대 교회나 철저한 공산주의 사회 속에서는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적극적인 문화 변혁 활동을 도무지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사회의 주도적 문화와 대립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카이퍼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입장이 이런 반립(anti-thesis)에 있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한다. 우리는 골수 깊게 하나님을 저항하여 나가는 이 세상에 대해 반립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 목적도 그런 하나님을 대항하여 높아진 것을 쳐서 복종케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그는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문화 변혁적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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