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오늘의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를 보면서
    카테고리 없음 2005. 4. 22. 13:07

    근자에 많은 이들이 천주교회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아졌다. 천주교회에서 교황이라고 일컫는 이가 한 사람 죽고, 또 다른 이가 선출되는 과정을 통해서 그 관심이 더 집중되어 있어서, 이제는 그 누구도 종교 개혁시대의 태도를 가지고 천주교회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하기가 어려워진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더 나아가 천주교회의 이른 바 교황이 모든 이의 교황인 것과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종교 다원주의적 분위기를 가득한 현대와 후-현대 사회 속에서는 그렇게 상호 용인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듯하다. 이런 정황 속에서는 신학적으로 종교 다원주의적 입장을 지닌 분들은 아무런 거리낌  한 천주교 교황의 등장을 축하하며 그와 연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것을 기대하고, 그런 기도도 하고, 그런 말들도 많이 하고 있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그리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 나가야 할까?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두 가지 중요한 요점을 말하고자 한다.


    1. 첫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적 판단을 벗어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천주교회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주장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 경계하는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적 사유와 실천은 결국 성경이라는 잣대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성경은 자와 척도라는 뜻의 "정경'(canon)이다. 이 정경을 토대로 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유와 행동을 재고 판단해야 한다. 교회가 얼마나 오랫 동안 어떤 일을 행해 왔는가가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주장하던 개혁자들의 목소리가 새삼 그립다. 요즈음은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는 있지만 진정 오직 성경에 근거한 사유와 실천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의 원리에 근거해서 결국 교황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을 천명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종교적 의미에서 우리의 아버지(papa)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No Papa, no father!  교황도 없고, 신부(father)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용어의 사용에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 "오직 성경"의 원리에 동의하지 않는 천주교인들은 계속해서 그런 용어를 사용해도, 우리들은 그것이 잘못된 용어의 사용임을 의식하고 그것을 천명해야 한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로 자처하거나 그런 언급을 받아서는 안 되고,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가 계신 하늘로부터 온 세상을 통치하시면서 동시에 당신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천주교에서처럼 그는 하늘에 계시기에 누군가가 그의 대리자(vicar)가 되어 우리를 다스리고 지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약속을 불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또한 오직 성경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는 사람이 구원 되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써만 칭의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이루신 공로를 믿음으로 칭의 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며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오직 그리스도로만 이루어지며,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칭의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있을찌어다"고 선언했던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이 번복되지 않는 한 천주교회의 구원론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구원관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천주교회의 가르침과 교리에 깃들여진 문제를 우리는 심각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 이와 같이 지금도 종교 개혁의 관점에서 천주교회를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고서는 천주교회와의 대화나 이야기가 불가능할 것일까? 이 글의 두 번째 요점은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도 천주교회와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도 역시 종교 개혁자들의 태도를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천주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이후에도 루터 등은 계속해서 천주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 행해 진리의 빛을 비추는 작업을 하였고, 그리하여 많은 이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도록 권하였다. 그래서 많은 천주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성경을 일고 루터와 개혁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복음을 다시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칼빈 같은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속해서 이미 복음의 도리를 믿고 받아들인 이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을 할 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천주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 향해서도 복음의 빛 비추는 일을 하였고, 그리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을 복음에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와 동시에 천주교 신학자들과 천주교 교회 정치가들과 종교 회의를 하여 그들과 성경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성경에 일치하는 가르침을 드러내는 일을 하였던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런 논의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앙을 가지고 성경에 충실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위해 천주교 신학자들이나 고위 성직자들과 대화하면서 천주교회도 좀더 성경적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들도 성경적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


    성경적으로 진전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는 입장에 충실한 것만이 바른 입장을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교회는 사람을 향해서 종교적 의미의 아버지라는 의식을 갖지도 않고, 그런 칭호를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에게 대해 사용하는 용어로서는 "No Papa, no father!"이라고 외치게 된다. 오직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천주교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성경적 가르침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가 진정 성경적인 방향으로 진전해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물론 개신교회와 개신교인들도 그들의 신앙과 삶이 철저히 성경에 근거하도록 노력해야만 이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이고, 우리의 대화의 근거이며, 우리가 이 성경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서로가 하나님에 뜻에 좀더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대화의 유일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초기 종교 개혁시대의 그런 대화가 오늘날 재개되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경을 기준으로 하는 대화가 성숙하여 갈 수 있었으면 한다.

     

    배경 사상 이해를 위한 홈페이지 소개:

    http://my.netian.com/~wminb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