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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5): 죄인들의 성화(2)”.
    카테고리 없음 2022. 7. 27. 08:05

     <월드뷰> 266 (20228월호): 110-14. ISSN 2234-3865에 실린 글을 여기에도 올려서 더 많은 분들이 일고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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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성화(聖化)의 기본적 내용을 정리하였다. 성화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어지는 칭의와 단정적 성화에 근거해서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점진적 과정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성령님의 감화와 역사하심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신 바를 우리가 소원을 두고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성령님의 힘으로 행하는 이 영적인 선”(spiritual goodness)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성화되는 사람들의 선행의 성격

     

    성화되는 사람들은 선행(good works)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로 인해 어떤 공로를 주장할 수 있지 않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가 그런 선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근거가 온전히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속에 동참한 사람들만이 이 영적인 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그런 선행을 하는 과정 전체에 있어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한순간도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행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진다. 따라서 선행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 많이 빚지게 된다. 그런데 그 빚은 갚아 버리기 원하지 않고 날마다 더 그런 빚을 지기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선을 행을 할 때 우리는 자신들에게 공로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둘째로, 우리가 한 선행이라는 것조차도 죄와 부패성으로 물들지 않은 것, 따라서 형벌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잘 말하고 있듯이,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4:6)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작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주께서 그것을 받지 않으시기에 충분하다.”(Belgic Confession, 24)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하고 흠이 많으니 그런 것으로 어찌 우리에게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공로(meritum)는 고사하고 우리가 행한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황에서 그 어떤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화의 과정에서 행하는 것이 과연 선행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과거에 좀 더 극단적 입장을 지닌 분들은 인간은 아무런 선행을 하지 못하고 그저 죄만 생산해 낼 뿐이라고 생각한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도 소위 시민적인 선(civil righteousness, iustitia civilis), 즉 외적인 일들(opera externa)은 행할 수 있으니 중생한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시민적인 선을 행할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의 심령에 역사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하려 하니 성화된 사람들이 일종의 선행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1)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만을 (2)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소원을 가지고, (3) 성령님의 역사(役事)하심에 의해서 행하는 것을 영적인 선(spiritual goodness)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들은 이런 의미의 영적인 선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것도 죄와 부패성으로 물들어 있음을 생각할 때, 또한 이런 영적인 선을 향해 가는 것이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생각할 때 이런 영적인 선도 전혀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인 선을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가 덮으시기에 이를 선()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종국적으로 보상(상급)을 주시는가?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것으로는 그 어떤 상급(reward)을 받을 만하지 않다는 것도 아주 명확하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힘쓴 자들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했으니 우리는 또한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여러 곳이 가르치지만 특히 다음 같은 말씀들을 보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6)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삼하 22:21; 18:20).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138:8)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61:7)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2:12)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께서 열심히 일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종국적으로 상을 주심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행한 것으로는 상을 받을 만하지 않는데 우리가 종국에 상을 얻는다는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성경을 제대로 믿는 우리 선배들은 그러므로 우리가 보상을 얻는 것이 우리가 행한 것 때문이 아니고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벨직 신앙고백서도 오직 은혜로만 상이 주어진다고 명백히 말한다. 선배들의 글을 읽어 보지 않아도 제대로 생각하는 분들은 다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다 제대로 생각했을 때 이르게 된 공통의 결론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오직 은혜로 하신 것인데,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것도 오직 은혜로 된다. 참된 성도는 이런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그러므로 이런 영적인 선을 행하는 진정한 성도들은 그런 방향으로 가면서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 더 힘쓸수록 더 감사하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적 의식(意識)의 특징이다. 우리에게 그 어떤 공로 의식이나 우월감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더 노력하면 할수록 주께서 더 많은 것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이 길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 더욱 더 깊이 감사하게 된다. 따라서 성화의 삶은 날마다 성령님께 의지해서 노력하는 삶이며, 또한 날마다 주께서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삶이다.

     

              상급의 성격

     

    그런데 주께서 종국에 주시는 상급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아서 간단히 상급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께서 종국적으로 주시는 상급을 우리가 물질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런 물질적 이해에 대해서 옛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물질적 오해라고 하였고, 이슬람교도들이 그런 물질적 오해를 많이 하므로 이슬람적 오해라고 할만도 하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물질적 오해가 많으니, 이를 한국적 오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잘 규명하기 위해서 먼저 종국적 상을 주시는 때를 먼저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다 최후의 심판을 말하고 그 후에 온전한 형벌과 온전한 상을 말하고 있다. 그 이전에 역사 안에서의 형벌이라는 것이 있으나 온전히 다 주어지지 않으므로 최후의 심판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과정에서 주께서 갚아 주시는 것이 분명히 있으나 기계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것을 바로 잡고 귀정(歸正)하는 최후의 심판 날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 날에라는 것이 최후의 심판 날이라는 것은 문맥상 누구나 알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잘 지적하는 바이다.

     

    성경이 말하는 상급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것이고, 또한 영원상태에서 할 일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주어질 의의 면류관은 결국 참된 성도들을 승리자로 인정하여 승리자로 인정하는 일을 하실 것인데, 바울은 고대의 방식을 따라서 월계관을 쓰워주는 일로 표상한 것을 영어에서는 “the crown of life”로 우리말에서는 의의 면류관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영원상태에 부합한 를 상으로 주신다는 뜻이다. 다른 곳에 언급된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1:12)도 같은 의미로 생각하며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는 영원상태에 부합한 영광과 의와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영원상태인 그 극치의 천국에 들어감을 주께서 넉넉히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딤후 4:18)라고 말한 것의 의미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14:22)고 말했다. 다 극치에 이른 천국을 의도해서 한 말이다.

     

    이 영원상태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할 것인데 그것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게 주어지고 그리하여 주를 위해 효과적인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각자 다르기에 각기 다른 영광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어떤 이는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이 달란트 비유에서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25: 21, 23)라고 하신 말의 의미일 수 있다. 이런 말의 함의를 질 생각하면서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극치에 이른 천국에서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나가면서 하는 정리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선행을 하나 그 선행은 그저 시민적인 선이나 자연적인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 대해서 그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선행을 하나 오직 성령님이 주시는 힘으로만 하기에 이를 영적인 선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것에 구원을 근거시키지 않는다. 자신들이 행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의미의 성화와 관련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 성화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공로에만 의존하게 된다. 그리스도에만 의존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항상 의심하게 되어 확실성이 없이 이리저리 밀려 요동하게 되고, 우리들의 가련한 양심은 끊임없이 가책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만 의존하는 그 사람이 진정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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