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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3): 죄인들에 대한 칭의”.
    카테고리 없음 2022. 6. 1. 20:49

     <월드뷰> 264 (20226월호): 104-107에 실린 글을 여기에도 오ㅓㄹ려서 더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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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하나하나 점검해 가는 중이다. 이미 전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하시는 일 전부를 성경 계시를 따라서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필 때 이번에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561년에 선언된 <벨직신앙고백서> 23항은 이렇게 고백하는 일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의 복됨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에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행위가 없어도 의롭다고 선언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복되다고 다윗과 바울이 가르친 대로(32:1; 4:6)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용서에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3:24).

     

    이것을 간단히 말하여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를 믿는 것이라고 칭한다. 루터가 여러 곳에서 시사하고 모든 개신교인들이 동의한 바와 같이, 이것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이것을 믿지 않고 다른 식으로 변경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신앙이 이신칭의를 믿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신칭의의 내용

     

                           (1) 이신칭의라는 말이 거부하는 것

     

    이신칭의를 믿는다는 것은 우선 우리가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지 못함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모두 거부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런 자력 구원(auto-soteric)의 생각을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라고 하였고, 이런 펠라기우스주의는 천주교회에서도 이단적이라고 배제한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최소한의 선이라고 행하여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넉넉히 해결할 수 있다고 하고, 혹시 그것이 잘 안 되도 그런 노력의 과정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하는 분위기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신칭의가 등장하지도 못하게 하는 이신칭의에 대해서 적대적인 분위기 가운데 살고 있다. 그 상황에서 오직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만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이다.

     

    또한 이신칭의를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타락한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을 믿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에 근거해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이 우리의 구원에 최소한의 기여가 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중세의 천주교와 현대 천주교가 이런 생각을 하고, 근자에는 예수님의 구속에 자신이 행위가 함께 해야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는 이단이 이렇게 생각하며, 형식적으로는 개신교 안에 있으나 구속에 더하여 성령님께 의존하여 산 삶의 내용이 고려 돼서 최종 칭의가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새 관점주의자들도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고집한다. 이런 것이 이신칭의를 참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2) 이신칭의의 적극적 내용

     

    이신칭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을 성경을 따라서 온전히 인정하면서 이렇게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에(전적인 무능력, total inability), 그 누구도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3:23) 다 치우쳐 죄인이 되었는데(3:10), 이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주셔서 이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다 감당하시고(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그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셔서 이루신(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 온전한 의(적극적 순종의 )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셔서(적극적 순종의 의의 전가), 그 의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다는 참으로 복된 소식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때 사용하는 용어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고 하고, 우리 선배들은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신다는 뜻으로 justification칭의(稱義)”라고 잘 번역하여 주셨다. 이런 잘된 번역에 많은 것이 이미 포함되어 있고 우리들은 그것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은 그저 같은 단어를 천주교회에서는 의화(義化)라고 번역하고 개신교회에서는 칭의(稱義)라고 번역하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고, 이 번역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학의 내용이 다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번역의 차이가 아니라,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입장과 세계관의 차이와 대립이다.

     

    그러므로 칭의에서 고려되는 의는 우리가 행한 의가 아니요 우리 안에 있는 의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에게 낯선 다른 사람의 의, 즉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러니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의만이 고려된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이 값비싼 행위와 의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즉 값없이 주셨으니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라고 말하고, 이것이 우리의 것에 되도록 믿으라고 하시고 믿으면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순종이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하셨기에 우리 편에서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받는다고 한다. 이렇게 믿는 것이 이신칭의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 이유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성경을 종교개혁의 형상적 원리(the formal principle)라고 하고, 그 성경의 내용인 이신칭의”-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인(the material principle)이라고 부른다.

     

              이신칭의를 믿는 태도와 그 결과

     

    <벨직신앙고백서> 고백자들은 이신칭의를 모든 것의 토대(foundation)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은 이 토대를 붙든다”(we cling to this foundation)고 하였다.

     

    (1) 이 때 (, 이신칭의를 믿는다고 할 때), 이 사실과 가르침이 영원히 확고하다”(firm forever)고 믿어야 참으로 이를 믿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 같다고 하든지, 다른 방식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은 실상 이 토대를 붙드는 것이 아니다.

     

    (2) 그리고 이신칭의를 믿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기본적으로 이신칭의를 온전히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후에 논의되겠지만 자신이 하는 것에 그 어떤 공로가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것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그의 삶 전체를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게 되어 있다. 이런 삶은 이신칭의를 믿는 것의 결과이기도 하고, 이를 믿는다는 태도가 과연 어떤 것이지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구원하심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아무 목적 없이 삶을 살 수 없고, 또한 다른 것을 위해 살 수도 없다. 이신칭의를 믿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3) 이신칭의를 믿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자체가 낮고 비참한 것일 뿐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사야처럼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6:5) 라고 말하며,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64:6)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말투와 태도와 그런 분위기를 가지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이신칭의를 믿는 것이 아니다.

     

    (4)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신칭의를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는 것 특히 우리의 공로를 전혀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에 더하여 우리가 행한 것도 어느 정도 우리의 구원에 최소한의 기여라도 하는 듯이 생각하거나 표현하는 것도 이신칭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싱칭의를 믿는 사람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순종만을의존할 뿐이다. 복음에 말씀에 그것을 믿으면 그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다고 했음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만이 무리의 죄를 다 가릴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그리스도의 순종만으로 우리를 과연 구원할 수 있을 지를 반신반의하거나 이것에 다른 것이 더하여져야만 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5) 그러므로 이신칭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접근할 때 있게 되는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로부터 우리들을 자유롭게한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떨면서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자신들을 가리며, 하나님을 피하려 숨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하나님 앞에서 피하여질 수 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이 조악된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에게 의존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를 자기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담대하게나아가게 된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에 의존하여 하나님 앞에 있게 된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에] 온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윗과 같이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143:2)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130:3)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감사함으로 주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신뢰하기에 오히려 따뜻함과 평온함을 느껴서 날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힘쓴다. 그래서 시편 기자와 함께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84:10)라고 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그래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84:5)고 고백하게 된다.

    멜랑흐똔

     

     

                                                     이신칭의 이해의 선구자 마틴 루터

     

                                                           가장 명료한 정리자 요한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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