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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의 회의체들(1) 당회와 집사회”.
    신학이야기 2021. 12. 2. 19:21

    「월간 고신 생명나무」 (2021년 12월호): 41-45에 실린 “교회의 회의체들(1) 당회와 집사회”.를 여기도 올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합니다. 함께 실린 윤석준 목사님과 성희찬 목사님의 귀한 글들도 같이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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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회의체들(1): 당회와 집사회

     

    <도르트 교회 질서>는 교회의 기본적 회의체들로 각 교회 공동체의 당회(the Consistory), 지역 노회(the Class), 그리고 각 지역의 대회(the Particular Synod), 그리고 총회(the General Synod)를 언급하고 있다(36).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난 이 독특한 교회들의 회의체들은 그 이전 시기의 주교들에 의해 교회가 통제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교회 체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겉으로는 비슷한 모임이 있을 수 있으나 감독제를 가진 교회(, 천주교회, 동방 정교회, 루터파 교회, 성공회, 감리 교회, 그리고 미국의 감독 교회)는 감독의 주관 아래서 위계질서(hierarchy)를 가지고 교회가 통제되도록 하는 것에 비해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 제도를 다시 찾아낸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는 성경적인 교회 회의체를 가지고서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 교회가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는 위계질서를 자신 교회가 아니고, 다들 수평적으로 연합된 교회라는 것을 드러내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 언급된 회의체들에 대한 시사(示唆)는 성경에 있으므로 그로부터 합리적으로 추론하여 개혁파 선배들이 각 교회 공동체의 당회, 같은 지역 교회들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모임이 노회(, 장로의 회), 지역의 대회(provincial Synod), 그리고 전국 교회들의 (그래서 노회들의) 총대들의 모임인 총회를 상정하고 언급하여 왔다. 당회(the Consistory)라는 말은 제네바에서 교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임을 그렇게 언급했던 것을 활용한 것이고, 총회는 프랑스 개혁파 총회와 스코틀란드 교회 총회 모임 등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서 지속적으로 그렇게 언급되면서 1년에 한번 혹은 2년에 한번 혹은 (도르트 총회의 경우와 같이) 문제가 있을 때에 모여서 교회 전체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 중에서 이번에는 당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당회의 구성과 모임

     

    <도르트 교회 질서>는 제37조에서 각 교회 공동체에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로 구성된 당회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이전 시대에 그리고 지금도 천주교회나 감독제를 가진 교회들이 한 사람의 주교나 고위 성직자들의 주도로 모든 것이 결정되던 것에 대한 반립 주장(anti-thesis)으로 나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주교 중심의 독재적 체제로부터 어떤 면에서 민주적 체제로 전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파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각 개인들의 민주적 의견 수렴에 의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가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도르트 교회 질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당회가 모여 교회 공동체의 여러 문제들을 같이 의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너무 율법적으로 적용하면 교회는 늘 회의만 하는 곳이 되기 쉽다. 마치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초기에 당회를 매주 목요일 저녁에 모였으니, 장로교회는 매주 목요일 저녁을 당회로 모여야만 한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런 규정들은 오히려 여러 당회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면서 함께 모든 결정을 하여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때 그 누구도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성경 이외의 것을 법제화하는 것의 문제가 바로 이런데서 나타난다. 우리는 필요하면 어떤 규정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규정들을 성경과 같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그런 것들은 부차적으로 필요해서 우리가 정한 것이니 그것을 존중하는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당시 상황에서의 독특한 규정으로 그 지역의 일반적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원할 때는 그 회중에 속한 한 두 사람의 대표자들을 당회에 파송해서 (당회에서) 논의되는 것들을 듣고 논의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37)고 하였다. 모든 분들이 믿는 사람이고, 통치자들도 교회의 모든 것을 존중하는 상황에서, 같이 협의하며 이 사회가 같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려는 조치라고 여겨진다. 이는 마치 제네바 교회의 당회의 장로님들이 제네바 의회에서 선정되도록 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세속 사회 속에서는 이런 규정은 무의미하다. 또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어떤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다 교회의 회원이 된 상황에서도 이런 것을 되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의 독립성을 더 강조하는 것이 성경의 원칙에 더 부합할 것이다.

     

    당회의 회의를 할 때는 목사님이, 또 목사님들께서 여러분 계실 때는 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take turn) 회의를 주재하고 진행하도록 하고 있다. 이 때 이 주재자가 회의를 잘 진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회장이라는 용어는 상당히 많은 곳에서 사용하는데, 이는 지양(止揚)하는 것이 좋다. 당회로 모일 때 그 회의의 의장을 당회의 의장이라고 하는 것이고, 도르트 교회 질서는 목사님들께서 돌아가면서 의장으로 섬기도록 규정하고 있으니, 이를 생각하면서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주의하는 것이 좋다. 그저 담임 목사님, 목사님이라는 용어가 평상시 사용하는 명칭이어야 한다. 오직 회의를 할 때만 당회의 의장(moderator)을 하는 것이고, 회의가 미쳐지면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당회의 성격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이것을 잘 구현하기 위해서는 (1)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들 가운데서 통치하고 계심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그러나 (2) 그리스도께서 어떤 개인을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로 세우셔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3)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가면서 배운 말씀의 원리를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하되 주께서 대표자들로 세우신 장로님들(,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 교회 공동체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우리 주님의 의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성경에 근거해서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같이 이끌어 내는 것이 당회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다. 당회를 비롯해서 모든 회의체는 성령님에 의존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받은 우리들의 결정이 나타나도록 한데 온힘을 쏟아야 한다. 그래서 여러 분들이 지혜를 모아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적용하도록 한 것이다.

     

              지역 노회와 밀접한 연관 관계 가운데 있는 당회

     

    각 교회 공동체가 독립하여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을 독립파라고 하고, 그들이 각 회중을 중요시하면서 이해하기에 회중파 정치 체제(congregational church system)라고 한다. 종교 개혁 이후에 이런 주장을 하던 분들이 나타났고, 특히 영국 청교도들 가운데 이런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독립파 또는 회중주의 입장을 강하게 천명하였다. 청교도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위 호국공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이런 독립파의 대표적 인사였다.

     

    그런데 우리들의 개혁파 선배들은 각 교회 공동체가 각기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회중이 독자적이고, 하나님께서 각각의 회중을 기본적인 통치 단위로 여기시지만 모든 교회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잘 드러내는 지역의 노회와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고, 그들이 너무 많아서 한 지역에서 다 같이 모일 수 없으므로 편의상 나뉘어 모이는 것을 각 지교회(肢敎會)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지역의 노회는 사실 하나의 교회인데 편의상 나뉘어 모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이 우리가 현상적으로 각기 다른 지교회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사실 우리들의 제한된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교회 회중을 매우 존중하여 그 회중의 일은 기본적으로 그 회중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지만, 동시에 여러 회중들이 다 연결되어 있음을 잘 표현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도르트 교회 질서는 이런 뜻에서 당회가 처음으로 구성될 때에는 노회(the Classis)의 권고를 받아 구성되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아직 당회가 없는 곳에서는 잠시 동안 노회가 교회 질서를 따라서 당회가 하도록 되어 있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39). 그래서 노회에서 임시 당회장을 파송하거나 지금 그 교회를 섬기고 있는 임시 목사로 하여금 그 일을 감당하도록 허락하여 미조직 교회지만 마치 조직 교회와 같이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교회 회중들이 간섭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장로님들의 수가 너무 적을 때는 집사님들도 당회에 참여할 수도 있다고 규정하여(38) 유연성 있는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당회가 그저 닫혀진 모임이 아니고, 실제로 회중을 섬기는 모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집사님들의 모임

     

    마치가지로 집사님들도 매주 모여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40). 이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으니 매주 헌금 계수를 하고 재정을 집행하는 일과 같이 일상적인 일을 할 때에도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며, 이 일에 목사님들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필요할 때에는 목사님들이 같이 참여 하여 논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40).

     

            나가면서

     

    이와 같이 각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회의는 우리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친히 통치를 하고 계심을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통치를 수종드는 모임이다.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 실제로 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누구도 그 권세를 찬탈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겸손히 주님의 통치를 받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도르트 교회 질서는 그런 정신을 잘 표현해 내고 있기에 우리가 존중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 교회 공동체를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스리심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해야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참된 교회임을 드러내게 된다.

                                                     

                                                     노회의 중요성을 잘 제시한 Samuel Ruther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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