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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개혁 493주년 기념 언약교회 신앙 강좌
    학회 등에 대한 소식 정보 2010. 10. 18. 21:06

    해마다 10월이 되면 우리는 종교 개혁을 생각합니다. 물론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 예배당 문에 95개 조항을 붙였을 때 그는 종교 개혁을 생각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당시 천주교회 내의 면죄부와 관련한 몇 가지 문제를 고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95개조 조항을 붙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 그는 여전히 천주교 신부였고, 교황제도를 인정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연옥의 존재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는 종교 개혁자도 아니었고, 종교 개혁을 의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안에서 이 95개조가 학생들에 의해서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에 퍼져 나갔고, 이런 루터적 생각에 대한 천주교회의 공식적 억압 속에서 루터는 성경을 더 읽어 갔고 1520년 종교 개혁 3대 문서가 나타날 즈음에는 구원 문제와 교회에 대해서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점차 확고해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근거한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의 공로에만 근거한 구원 이해, 즉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 말미암는 “오직 은혜”(sola gratia)에 근거한 구원을 말하는,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려 드리는 데 관심을 가졌던 루터파 사상과 이를 더 철저히 하고 더 성경적으로 수정해 나가려고 했던 개혁파(Reformed) 사상은 교회 전체를 오직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하게 하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켜 놓았습니다. 그 당시의 이런 획기적인 변화 노력에 비추어 볼 때 오늘 우리한국 교회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 시대에 우리가 종교 개혁에 즈음해서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종교 개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늘 물어 가는 언약교회는 2010년 올해에도 종교 개혁과 그 현대적 의미릃 생각하는 모임을 가집니다. 올해에는 4월초에 강동구 상일동으로 옮긴 새로운 예배처소에서 처음 맞이하는 종교 개혁 강좌이고, 이곳에서 처음하는 외부 행사로 10월 23일(토) 오후 6시부터 총신대학교에서 기독교 철학과 문화적 변혁을 강의하시는 신국원 교수님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주일인 24일 (주일) 저녁 6시 저녁 예배 시간에는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이승구 교수를 통해서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동안 수년 동안에 주로 칼빈의 생애와 교회 개혁의 의미를 물어 왔던 언약 교회 종교 개혁 강좌가 이제부터 몇 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칼빈적 사상이 어떻게 전개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데, 올해에 그 첫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2010년 언약교회 종교 개혁 기념 신앙 강좌 진행 과정

     

    <신앙 강좌 1>

    일시: 2010년 10월 23일 (토) 오후 6시-7:30

    장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신) 언약 교회 예배당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70번지)

    약도: http://www.cvtchurch.org 참조)

    주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답의 종교 개혁적 함의

    강사: 신국원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철학, 기독교 철학, 문화학)

     

     

     

    다음은 간단한 강의 요약입니다. 못 오신 분들이 유익을 얻기를 원합니다:

     

    10월 23일 오후 6시에 언약교회에서 개최한 493년 종교개혁기념강좌에서 총신대신국원 교수는 17세기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과 1답을 가지고 강의했다. 그는 개신교의 명품은 개혁신학이라고 언급하면서 살아 있는 개혁신학이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1문과 1답이 개혁주의 신학의 이념과 생각들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 고백의 출발점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이다. 창조주를 인정하며 우리에게 맡긴 소명을 책임감 있게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한다는 것은 네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영광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청지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맡아서 책임져야할 일들이 있다. 이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즐거운 삶이며 행복한 삶이다. martyr complex가 아니라 섬김의 삼은 즐거운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삶의 위로를 주신다. 하나님을 통해 신비적 즐거움이나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하나님을 사용하고 이용하여 얻는 즐거움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에녹과 바울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동행의 즐거움과 그분을 섬기는 섬김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 섬김은 삶 자체 이다. 가장 큰 즐거움은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과 함께 일한다는 소명이며 이 소명은 영생의 소망까지 연결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개혁주의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 강좌 2>

    일시: 2010년 10월 24일 (주일) 오후 6시-7:30

    장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신) 언약 교회 예배당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70번지)

    약도: http://www.cvtchurch.org 참조)

    주제: 스코틀란드 종교 개혁과 요한 낙스 (1)

    강사: 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는 1) 제의적인 것만 중요시하는 교회로 나아가 결과적으로 삶과 예배를 분리하며, 이 제의주의는 2)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행함이 동시에 요구되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를 드러낸다. 또한 3)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영적인 것, 즉 영성을 개발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것과 4) 교회의 직제들이 성경이 말하는 형태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상황을 전제하며 스코틀랜드에서 로마가톨릭에 대항하여 개신교 신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것 때문에 때로는 도망과 화형당하는 상황 속에서 요한 낙스가 어떻게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진행시켰는지를 살폈다. 1. 요한 낙스의 출생과 배경, 2. 개신교도 낙스, 3. 영국에서의 활동, 4. 유배자의 순서로 다루었다.

         스코틀랜드 하딩톤에서 태어난 낙스는 Dunblane 주교에 의해 천주교 사제로 임직하고 공증인과 가정 교사 역할을 하던 중 당시 스코틀란드의 왕이던 제임스 5세가 죽고 난후 Mary Stuart의 섭정인 James Hamilton의 통치 기간에 그의 궁정목사 Thomas Gilyem(Gwilliam)에 의해 개신교로 개종하여 George Wishart(1513-46)에 영향을 받는다. 낙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Wishart가 St. Andrews에 있던 Beaton 추기경의 명령으로 화형당하자, 비톤 추기경을 살해하고 St. Andres 성에서 항거하던 개신교 혁명가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의 개입으로 개신교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 그는 120명의 항거자들과 함께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을 젖는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몸이 약해져서 풀려난 그는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천주교의 미사를 공격하였다. 가톨릭의 화체설에 대항하여 성찬 요소들은 실제 몸과 피가 아니며 절하는 것은 온당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내용이 제 2 기도서의 각주 (Black Rublic)에 들어 가게 하는데 기여한 그는 개신교에 반하는 Mary Tudor가 즉위하여 800여명의 개신교도들과 함께 대륙으로 도망하였다. 당시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 등은 300명의 개신교들은 화형과 고난을 당하였다. 칼빈과 불링거(Bullinger)를 만나 우상 숭배하는 통치자와 여성 통치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하며 고민하던 낙스는 칼빈의 격려로 프랑크프르트에 있는 영국 피난민교회에서 목회를 한다. 기도서를 따르는 예배를 드릴 것인가 좀더 성경에 충실한 것인가의 문제로 이 교회를 사임한 낙스는 다시 제나바로 돌아가 제나바판 영어 성경 편찬 작업을 하게 된다. 이어지는 요한 낙스의 스코틀랜드에서의 구체적인 사역은 내년 종교개혁기념강좌를 기약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에 성경적 장로교회가 세워 지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한 낙스의 생애를 더듬어 가면서 우리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생각과 교회의 예배와  교회의 제도를 바꾸어 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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