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

원상태의 아담은 과연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1)

wminb 2025. 4. 12. 13:31

<월드뷰> 298 (2025년 4월호): 129-32에 실린 글을 여기에도 올려서 더 많은 분들이 보도록 하니 부디 많은 분들이 보시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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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의 대화(14)

 

                                          원상태의 아담은 과연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1)

 

생명나무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실재성을 잘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생명나무를 좀 문자적 이해를 하여 조금의 문제를 드러낸 카이퍼는 창조 받은 아담에 대해서는 매우 정확하고 바른 견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창조된 아담에 대한 개혁파적인 이해를 천주교의 반쯤은 펠라기우스적인 입장 대조하면서 제시한 카이퍼(Commmon Grace, 1. 18)의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계속해서 이 대조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얼마나 온전하게 창조하셨는가를 잘 논의하고 있다.

 

          천주교가 말하는 덧붙여진 은총으로서의 원의 개념의 문제점

 

카이퍼는 원의라는 덧붙여진 은사가 있어야만 인간이 온전해지는 식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이해하려는 천주교적 이해를 비판한다(CC, 1. 19. 1=1:165; 1. 20. 1=1:173). 카이퍼는 흥미로운 예를 들어서 설명하기를 천주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하면, “사람의 성질(nature)은 그를 넘어지게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조 지팡이(a crutch)를 더하여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그런 보조 지팡이가 필요한 것은 사람의 자연적인 다리는 스스로 걷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CC, 1. 19. 1=1:165). 결국 이런 입장은 물질을 만드신 하나님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고 카이퍼는 천주교 입장을 비판한다(1:166). 다시 말해서, 천주교 입장은 처음에 흠과 문제없는 성질로 인간을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을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1:165). 물질 안에 내재해 있는 어떤 성질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무력하다고 하는 것이 되니(1:166), 결과적으로 천주교 입장은 무능한 하나님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천주교의 입장은 결국 흠 없는 인간의 성질을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1:166). 이에 대해서 과연 그런가를 의문시할 분들을 위해서 종교개혁 이후 반동 종교개혁 입장을 잘 대변하는 천주교 변증가인 벨라르민(Robert Bellarmine, 15421621)의 다음과 같은 말을 카이퍼가 인용하여 제시한다: “엄격히 그의 성질(nature)만 생각하면, 육체가 원하는 바(the desire of flesh, concupiscentia carnis)는 아담은 물질로 구성된 된 것에서 기인한 어떤 결함, 어떤 병이 있는 존재가 되게 했을 것이다.” 물론 베라르민에게 공정하기 위해서 죄에 대한 갈망이 처음 일어난 것은 죄가 아니고 그것에 인간이 동의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 주장한다는 것도 정확히 언급한다(1:166).

 

본래부터 영과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물질을 생각하는 천주교회의 입장은 (1) 물질 안에 항상 하나님께 대립하는 힘이 있는(a force within matter comes to stand over against God) 것처럼 하는 것이고, (2) 따라서 사람의 몸이 죄의 원천(the fountain of sin)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1:166). 그렇게 되면, 사람은 타락 전에 아직 죄가 없어도 불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죄에 대한 유혹과 죄에 대한 어떤 경향성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1:166).

 

더구나 천주교 자체가 인정하고 주장하는 바로도 원의(原義)는 사람의 유기적 부분에 속한 것이 아니고 기계적으로 덧붙여진 것이라는 것이다.

 

          천주교 입장과 대조되는 개혁파의 물질과 성질에 대한 입장

 

이런 천주교 주장에 반()해서 개혁파는 물질에서 죄가 기원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영적인 존재요 계속해서 영적인 존재로 있는, 그래서 몸과 그 어떤 물질적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탄에게서 죄가 기원하였음을 강조한다(CC, 1. 19. 2=1:167). 개혁파는 질료나 형상(본질) 안에 몸이나 물질 안에 항상 하나님을 대항하는 힘이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1:167). 개혁파는 우리의 본성에 덧붙여진 어떤 것을 우리가 상실해서 우리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타락 때문에 우리의 본성 자체가 타락하여 더렵혀지고, 그 본래의 탁월성인 원의가 사라졌기에 문제에 직면했다고 주장한다(1:167). , 원의는 성질(nature)에 속해 있고, 성질과 불가분리적이라고 주장한다(1:167; 1:199). 원의는 그의 성질과 유기적으로 묶여 있는 것이다”(“organically bound up with his nature.” CC, 1. 20. 1=1:173).

 

          개혁파적 입장에 따라 본 처음 창조 받을 때 인간의 정상적 모습:

                       하나님을 위한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

 

사람은 처음 창조 받았을 때 하나님 아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해(only for God and for God’s sake) 존재하는 존재로 창조 받았다(CC, 1. 19. 3=1:168).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니, 아담 자신도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이다(CC, 1. 19. 6=1:170). 이렇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하나님의 용도에 사용되도록 창조되었다”(CC, 1. 19. 3=1:168). 카이퍼는 이런 이해를 중심적 개혁파 입장”(the central Reformed position)이라고 하기도 한다(CC, 1. 20. 1=1:172).

 

그러기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용도에 적합한 것들을 다 구비해 주셨다. 카이퍼는 사람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복됨을 위하여라고 이중의 목적(dual purpose)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1:168). 그런 표현에 인간에게 조금의 독립성이라도 인정하는 펠라기우스주의의 메아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1:168). 카이퍼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는 것이 큰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1:169).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되었음을 강조할 때 성경적 입장은 우리의 뛰어남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기에 적합한가를 강조하게 된다고 한다(CC. 1. 19. 4=1:169,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개혁파는 아담이 하나님에 마주하여 서는(vis-à-vis) 독립적 입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1:169).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처음 창조한 인간 안에서 당신님의 어떤 것(something of himself)을 보기를 원하신다고 한다(1:169).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형상을 보기 원하신다고 한다(1:174). 이와 연관해서 카이퍼는 다른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흔적(imprint of God)이 있고 하나님의 행하는 것에 하나님의 족적(the imprint of God’s footstep)이 있지만 다른 것에서는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 없는데, 오직 사람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1:169). 그것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카이퍼는 말한다. 그래서 오래전에 요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것과 비슷하게 카이퍼는 다음rhk 같이 말한다: “사람 안에 창조하신 신적인 것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1:169).

이때 아담은 그는 자신 안에 온 피조계를 품고(encapsulate), 피조계를 제물로 들고서 경배와 감사로 그의 하나님 앞에 꿇어 경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피조계의 대제사장”(high priest)으로 세움을 입었다고 잘 표현한다(CC. 1. 19.5=1:170). 그러니 낙원에는 제단이 있지 않았지만, 낙원 전체가 아담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의 영광을 하나님께 드릴 제단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1:170)도 비유적 의미에서 이해하면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1:170)는 것도 적절한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질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받았으니 사람이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다(17:29). 그러나 이렇게 높고 고귀하게 지음받은 것도 사람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 때문에 하신 것이다”(1:171)는 강조도 개혁파 신학자인 카이퍼다운 표현이다.

 

          카이퍼의 표현 중에 좀 지나친 부분

 

이렇게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고귀함을 잘 강조하면서 표현하는 중에 또 때때로 나타나는 카이퍼다운 문제로 조금 지나치게 표현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서, (1)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의 말씀으로 자신으로부터 나아간 세상을 다시 자신의 핵심(his divine heart)으로 오게 하려고 원하신다고 말하는 것(CC, 1. 19. 5=1:170), 또한 그것에 이어서 (2) “사람의 입에서 예배의 찬송이 그에게 올라갈 때만 하나님 앞에서 영감된 말씀 안에서 해석된 창조의 말이 그에게 되돌아간다고 말하는 부분, (3) 사람의 하나님의 형상됨을 강조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사람 외의(apart form man) 이 세상은 하나님과 거리를 가지고 있다; 사람 안에서 세상은 하나님께 가까워 진다고 말하는 부분이다(1:170). (4) 사람에게서는 처음으로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어떤 것이 생동하며 빛을 낸다(something of God’s own life beats and sparks). 사람이 아직 있지 않았던 때 하나님 앞에서 조용하던 하나님의 온 피조계가 이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 말씀드린다고 말하는 말(1:170),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인 (5) “사람이 없이는 피조계가 차갑고 생동력이 없었는데, 이제 인간 영혼의 빛이 이 세상에 비취자 세상으로부터 다시 하나님을 비취어 내며, 이제 피조계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고, 그에게 감사의 숨을 내어 쉰다는 말(1:170)도 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너무 강한 표현이라고 느껴진다.

 

카이퍼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들은 아담 창조 이전의 이 세상이 하나님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인상도 주게 된다. 카이퍼의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렇게 오해를 낳을 수 있는 표현을 카이퍼 자신이 피했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을 모든 피조계가 인간을 섬기어 궁극적으로 사람이 그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하는 벨직 신앙고백서 12항과 연관시키면서 설명하는 부분은 카이퍼의 뛰어난 창조적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벨직 신앙고백서의 직접적 의미로부터는 좀 먼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렇게카이퍼는 때땔로 너무 지나치게 나아가는 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